이름 없는 비석
그날, 제주의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세찬 바람에 눈발까지 날렸다. 까마귀들이 눈발 속에서 울어대며 웃무드내 하늘을 빙빙 돌다가 나뭇가지에 앉았다. 을씨년스러웠다.
어떤 이들은 폭동이라 했고, 어떤 이들은 사건이라 했으며, 어떤 이들은 항쟁이라 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죄없는 수많은 제주의 양민들이 미군과 정부군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그 희생들은 온전히 안식하지 못했다.
제주 4.3 ……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교체된 후에야 비로소 제주 4.3의 진상이 하나둘 밝혀졌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을 전하기 전까지 그들은 숨죽여 울지도 못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들은 처절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오로지 한라산 중산간의 바람과 까마귀 울음만이 그들과 함께 했다. 그 아픔과 절망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 무고한 사람들의 영혼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제주 4.3 평화기념관 전시실 입구에 이름 없는 비석, 백비(白碑)가 놓여 있다. 그 비석 앞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여 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제주는 세상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 섬에는 너무나 슬프고 아픈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아픔과 슬픔이 여전히 온전하게 위로받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전시실을 나오면서 낮고 목메인 소리로 <잠들지 않는 남도>를 읖조리며 그들의 평안을 기도했다.
One thought on “이름 없는 비석”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자, 제주도민들은 비로소 통곡하면서 환호했다. 이 사과까지 5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