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늘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는 젊었고,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다. 야단을 맞을 때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왔으면 할 때도 있었다.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이었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내가 커서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아버지는 나에게 반면교사였다.
지금 나는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거울을 보면서 문득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놀란다. 아이를 야단 치면서 내가 어릴 적 싫어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소리지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아버지는 이미 내 안에 들어있다.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야단을 치지 않으셨다. 물론 내가 어릴 때처럼 야단 맞을 짓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점점 늙어간다는 또다른 증거였다.
아버지가 되어보니 알겠다. 아버지만큼 아버지 노릇 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어릴 때에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작심한 내가 지금은 제발 아버지만큼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로 변했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사랑하고 계신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보다는 친절한 아버지가 되었지만, 내 아이를 얼마나 잘 키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내게 해 주신 것만큼 나도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을까? 제발, 제발, 그렇게만 되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당신의 은혜를 갚는다는 부질없는 약속은 하지 않으렵니다. 그냥 아버지처럼 저도 제 자식을 사랑하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더 바라는 일일테니까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8 thoughts on “아버지의 그늘”
자식(특히, 아들)을 둔 모든 아버지의 고민입니다.
아버지 나 그리고 아들
저희 아버지랑 똑같으시네요… 마치 제 이야기를 읽고 있는 듯 합니다.^^
가슴에 감명을 가져다 주는 좋은 글이군요.
좋은 글을 발췌하여 그 느낌을 공유 시켜주는 소요유님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답니다.
시인 신경림의 “깊은 산속 약초같은 사람 전우익”의 글을쓰신 그분이 맞는지….
나의 현실을 빌미로 아버지의 의무를 간과하지 않으며
항상 겸손과 지혜로운 아버지가 될려 노력하는
소요유님은 이미 좋은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는듯 합니다.^!^
SoandSo 님 / 저는 아들이 없어서 아들을 키운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잘 모릅니다. 어떤 때는 나를 닮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나를 닮은 아들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집사람이 워낙 딸을좋아하다 보니 딸 하나 낳고 그만 낳는다고 하더군요. 🙁 아들이 있으면 든든할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Bee 님 /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왜 그렇게 무뚝뚝했는지 모르겠어요. 속마음은 안 그러신데 표현하시는 것은 참 서툴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아버지도 그러셨구요. 어렸을 때는 섭섭할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 속마음을 아니까 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늙은 가시는 모습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구요.
pine 님 / 과찬이십니다. 시인 신경림이 “깊은 산 속 약초 같은 사람 전우익”을 쓴 분 맞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이구요. 저도 진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력해야겠지요. pine님도 행복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조금 생각이 다른것중에 하나가
부모의 역활입니다.
우리는 국영수를 학교에서 배우지만,
부모의 역활은 배우지 않습니다.
따로 짬내어서 공부하는사람도 적고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것으로
부모의 역활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의 역활중 문제중에 하나가
어릴때 부모의 안좋은점을 보면서
크면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크면 똑같이 합니다.
내가 해야지 하는것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해야 된다고 합니다.
하지말아야지, 하지말아야지.. 한다면,
기억속에는 하지말아야할것들만 학습되고,
그런 상황이 닥쳤을때 내가 결정할수있는
판단은 그 하지말아야지 중에 하나가 될수밖에 없다는거죠.
그 시절아버지의 정보습득의 한계가 있었다면,
지금은 동기만 갖게 된다면, 원하는 정보를 가질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뛰어나야 배운것에 노력한것이 있는것이고,
자식또한 부모보다 그렇지 못하다면, 현실을 핑게삼아
안주했다고 생각합니다. ^^;;;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은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현실적으로 다가가고, 사랑하는 방법을 책을보고,
다른사람 경험을 듣고 공부해야 된다고 봅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날자고도 님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도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보고 배워고 공부해야 합니다.
마음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사랑도 결국은 실천이거든요.
행복하세요. 😉
뒤늦게 트랙백이 된 걸 알았습니다. 아버지들의 마음은 비슷비슷하군요. 아무튼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분야가 ‘아버지되기’이고 말씀하신대로 실천이 중요한 것 같네요. 더운 여름 가족모두 건강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
CeeKay 님의 좋은 아버지 되기 강의를 한 번 듣고 싶네요.^^ 더운 날씨에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기도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