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를 쉽게 욕보이는 방법 2

망자를 쉽게 욕보이는 방법 2

김민석(이라고 쓰고 김민새라고 읽는다)이라는 자가 있다. 이 자가 민주당 지방선거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최고의원이란다. 이 자는 유시민이 경기도 지사에 출마한다고 선언하자 연일 “노무현 정신”을 운운하며 유시민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민주당 지방선거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민석 최고위원은 10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최종적 선택을 보고 말씀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다”면서도 “원래 경기도에서 국회의원 하다가 대구 가서 대구시장 한다고 했다가 서울 왔다가 또 경기도까지, 어디까지 갈지”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또 “민주당의 한계를 지적하며 나온 국민참여당은 지도급 인사들을 영남에 전진배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지한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본다”며 “상당한 아쉬움을 갖고 있고, 그게 노무현 정신에 맞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김민석 “유시민, 영남 출마가 노무현 정신에 맞지 않나?”, 프레시안>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지만, 김민석이라는 자가 어떻게 “노무현 정신”을 입에 담을 수 있나?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아무말이나 함부로 지껄여도 되나? 배신을 밥먹듯 하는 이런 자가 어떻게 제1야당이라는 민주당의 최고의원을 할 수 있으며, 지방선거기획본부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그러고도 민주당이 김대중,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유시민이 정계에 발을 담근 이유가 바로 김민석 같은 자가 노무현 등에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2002년 후단협을 만들고 정몽준에게 날아간 자가 누구였던가? 그 단일화 과정에서 끝까지 훼방을 놓고 재를 뿌렸던 것이 누구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구? 그러면 오마이뉴스의 유시민 인터뷰를 읽어보라.

유씨는 “국민후보로 뽑힌 노무현을 아무런 이유없이 낙마시키려고 하는 민주당 반노(反盧)·비노(非盧)그룹의 행동은 국민들에 대한 배신 행위이자 사기 행위”라며 “이같은 비민주적인 행위에 대해 규탄하고 항의하는 시민·지식인 사회의 목소리를 조직하는 일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학생운동 시절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절박한 심정“이라고 부연했다.

<“화염병 들고 바리케이드로… 노무현에 대한 반칙 응징하겠다”, 오마이뉴스>

2002년 민주당은 자기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을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고, 김민석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더러운 짓을 일삼았다. 오죽했으면 당시 시사평론가였던 유시민이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심정이라고 얘기했겠는가. 그런 김민석이 노무현 정신을 운운하면서 유시민을 비난하고 헐뜯는다? 지나가던 이명박 <무소유> 읽는 소리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식 날, 유시민을 자기 후계자로 삼았다. 물론 공공연히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노무현은 유시민에게 고맙다며 기어이 봉하마을 퇴임기념식 단상 위로 유시민을 불러 올렸다. (나는 이 동영상을 보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제가 그렇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은 가장 어려울 때 저를 지켜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랬듯이, 어려울 때 친구가 친구고, 어려울 때 견디는 정치인이라야 진짜 정치인입니다.

<노무현, 봉하마을 귀향 연설 중에서>

누가 뭐래도 노무현의 뒤를 잇는 후계자는 유시민이다. 어디 감히 김민석 따위가 유시민에게 노무현 정신을 운운한단 말인가? 아직도 이런 자가 민주당 최고의원을 하고 있기에 민주당의 존재감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저렇게 개판을 치고도 히히덕거리고 웃을 수 있는 이유다.

김민석은 그 입 다물고 정계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영원히 잊혀져야 한다. 그 길이 그나마 김민석이 구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김민석 같은 인물이 있는 한, 민주당은 결코 한나라당을 넘어설 수 없다.

망자를 쉽게 욕보이는 방법 1

망자를 쉽게 욕보이는 방법 1

망자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생전의 관계가 어떠하든 예의를 차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어제 입적하자마자 청와대 대변인은 이런 식으로 논평을 했다.

법정 스님의 저서 <조화로운 삶>에 대해 이 대통령이 “산중에 생활하며 느끼는 소소한 감성과 깊은 사색을 편안한 언어로 써 쉽게 읽히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고 말한 추천의 사유도 소개했다.

이어 김 대변인은 “대통령이 해외 출장이나 순방갈 때, 휴가 떠날 때 법정 스님 수필집을 지니고 갔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한 핵심 참모는 “이 대통령과 법정 스님의 철학이 비슷하다”면서 그 비슷한 점을 “소박한 삶과 중도”라고 밝혔다.

<청와대 “이대통령과 법정스님 ´중도´ 철학 비슷”, 데일리안>

내가 알기로 법정 스님은 <조화로운 삶>이란 책을 쓴 적이 없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을 읽은 적은 있지만, 법정 스님의 <조화로운 삶>은 없다. 도대체 이명박이 읽었다는 책은 도무지 무엇이란 말인가. 법정 스님의 저서가 조화로운 삶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나온 적은 있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책은 안 읽고 출판사만 읽었단 말인가.

이명박이 즐겨 읽는 책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말을 듣고 기겁을 하며 웃은 적이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이명박이 법정 스님의 책을 좋아한 것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의 책은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못준 것 같다.

이거야 청와대 대변인의 하찮은 실수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뒤의 청와대 핵심 참모라는 자의 말은 더욱 가관이다. 이명박과 법정 스님의 철학이 비슷하다면서 그것을 “소박한 삶과 중도”라고 말했다. 갑자기 개그맨 안영미의 말이 생각났다. “얘네들 미친 거 아냐~~.”

입적하신 스님을 욕보여도 이렇게 욕을 보일 수 있을까. 스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반대했다고 이런 식으로 욕을 보인다 말인가. 어떻게 이명박의 철학과 법정 스님의 철학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당신들의 상상력이 부럽기만 하다.

법정 스님은 한반도 대운하(지금의 4대강 죽이기) 사업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연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바라봐야 한다. 자연은 인간과 격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이며, 자연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우리는 그 자연의 일부분이며,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한 부분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자연을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업으로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크게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끔찍한 재앙이다.

<중략>

강은, 살아 있는 강은 굽이굽이마다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이런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깊은 웅덩이를 파서 물을 흐르지 못하도록 채워 놓고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놓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강이 아니다. 갈수록 빈번해지는 국지성 호우는 토막 난 각 수로의 범람을 일으켜 홍수 피해를 가중시킬 것이 뻔하다.

대통령 공약사업 홍보물의 그럴듯한 그림으로 지역주민들을 속여 엉뚱한 환상을 불어 일으키고 있다. 개발 욕구에 불을 붙여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이 사업을 추진하려는 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처사이다.

일찍이 없었던 이런 무모한 국책사업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면 우리는 이 정권과 함께 우리 국토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법정 스님, 한반도 대운하 안된다>

법정 스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한반도 대운하, 즉 4대강 죽이기 사업은 이 땅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끔찍한 재앙이고, 지극히 부도덕한 처사이며, 이것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온 국민의 80%가 반대하는 사업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고 진행하는 자들이 법정 스님과 철학이 비슷하다고? 그것도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은 스님의 법구 앞에서 할 말인가? 그러고도 당신들이 과연 인간의 탈을 썼다고 할 수 있는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여, 이제 더 이상 법정 스님의 맑은 정신을 욕보이지 마라.

5만불 받은 의자를 보며 한명숙 대통령을 꿈꾸다

5만불 받은 의자를 보며 한명숙 대통령을 꿈꾸다

결국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돈을 준 것은 한명숙 전 총리가 아니고, 총리 공관에 있는 의자임이 밝혀졌다.

곽 전 사장은 “돈을 직접 줬느냐”는 김형두 재판장의 질문에 “오찬이 끝난 뒤 두 장관(강동석, 정세균)이 나가고, 내가 조금 늦게 나가면서 인사를 하고 나갔다”며 “인사는 포켓 안에 든 돈봉투 2개를 내가 앉았던 의자 위에 놓고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재판장이 “(돈봉투를) 식탁이 아니라 의자에 놓고 나온 게 맞느냐, 오찬 참석자 4명 중 돈을 놓고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곽 전 사장은 “4명 중 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김 재판장이 거듭 “한 전 총리가 돈봉투를 놓는 장면을 봤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인사하면 미안하니까 그냥 놓고 나왔다, 어떻게 보여주겠느냐”고 답했다.

<곽영욱 전 사장, 돈봉투 진술 ‘오락가락’, 오마이뉴스>

총리 공관의 의자는 돈 5만불을 받아 어디다 썼을까? 이제 검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자를 체포해 구속시키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런 물증도 없이 오직 돈을 줬다는 곽 전 사장의 말에만 의존해 (이것도 곽 전 사장이 자발적으로 얘기했는지조차 의심스럽긴 하지만) 한 전 총리를 기소한 검찰이지만, 법정에서 곽 전 사장은 의자에다 돈을 놓고 왔다라고 했으니 검찰의 처지는 사면초가가 되었다.

검찰은 “총리 공관 의자”를 출국금지시키고, 당장 영장을 발부받아 구속시켜야 할 것이다. 모든 과정이 TV로 생중계될 것이고, 의자는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다. 과연 검찰이 의자의 유죄를 밝혀낼 수 있을까?

내가 인정하는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의 단 한 가지 능력은 이들이 동물적 감각으로 누가 핵심인지를 찍어낸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죽이고 난 후, 이들은 한명숙 전 총리가 민주 세력의 핵심임을 알았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혐의를 씌워 한 전 총리를 기소한 것이다. 노무현을 죽였던 것처럼 한명숙도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런데, 한명숙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노무현을 포함하여) 이땅의 모든 남자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오연호 기자와 만나 인터뷰했던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친노 예비 후보들 중에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가 되는지 모르지만, 나보고 마음대로 지명하라고 그러면 한명숙씨요.”

“앞으로의 우리 정치는요, 이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상대하고도 대화를 하는 쪽으로 가야 됩니다. 사회적 갈등 과정에서도 사람들하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근데 그 점에서 한명숙씨가 굉장히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 소신에 관해서는 강단이 있지만 사람이, 느낌이 부드러워요.

“부드러우면 상대방한테 신뢰를 줘요. 이 사람하고 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다 진심인 줄 알고 진지하게 대화를 해요. 나까지 나서 대화를 해도 도저히 안 풀리는 어떤 사안이 있어서 한명숙 총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이제 그만두십시오. 그거 되지도 않을 타협을 뭘 자꾸 하려고 그럽니까?’ 그러면 한 총리가 ‘아, 그래도 조금 며칠만 나한테 맡겨놓아 주세요’ 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 사안을 잊어먹고 있으면 보름 되고 한 달 되고 하는데, 어찌어찌 해 가지고 그 문제를 풀어서 가지고 와요.”

앞으로 우리 정치 풍토나 분위기 같은 것으로 봤을 때 좀 부드러운 지도자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점이 부족한 것이) 나는 항상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 보면 이상하게 이 사람들(정적)이 저 사람이 나를 뭔가 해코지할 거라는 불신 아닌 불신감을 갖고 있거든. ‘또 저게 무슨 꼼수를 내나?’ 저 사람들은 내가 꼼수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 나는. 꼼수를 안 부리는데도.”

<“내 마음대로 차기 지명하라면 한명숙” 승부사 노무현, 부드러움을 부러워하다, 오마이뉴스>

노무현 대통령의 안목은 정확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소신과 강단이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감싸안는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한명숙 전 총리를 볼 때마다 나는 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천하의 노무현도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을 가질 수 없었고, 그걸 가진 한 전 총리를 부러워했다.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의 앞잡이가 되어 버린 검찰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한명숙 전 총리가 민주 세력의 핵심임을 꿰뚫어본 것은 가상하나, 그를 절대로 잡아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검찰은 한명숙 전 총리의 선거운동을 앞장서서 해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서울 시장에 당선될 확률은 점점 높아질 것이고, 차기 대선에서도 가장 유력한 주자로 떠오를 것이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박근혜가 유력한 차기 후보가 될 것이고, 그 박근혜를 잡을 사람은 바로 한명숙 전 총리가 될 것이다. 한명숙을 차기 대통령으로 생각했던 노무현의 바람은 역설적으로 검찰의 의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한다고 울림을 주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오늘 5만불을 받은 의자를 보면서 한명숙 대통령을 꿈꿔 본다.

법정 스님의 유언,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스님의 유언, 아름다운 마무리

엊그제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하얗고 하늘은 푸르렀다. 그 하얀 세상 위로 이른 봄의 햇살이 내렸다. 서럽도록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이 땅의 맑은 영혼,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

스님은 몇 해 전부터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맑고 향기로운 이른 봄날을 택해 생을 달리하셨다. 평생을 비움과 내려놓음으로 사셨던 스님은 소박하고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필력으로 수많은 중생들을 일깨우셨다. 스님의 글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는 스님께서 그 글보다 더 아름답고 간소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리라.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안다. 스님은 가셨지만, 스님이 남겨놓은 향기는 우리 안에 영원할 것이다.

스님의 마지막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 중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글은 스님께서 나같은 중생에게 해주시는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믿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의 자연을 되찾는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개체인 나를 뛰어넘어 전체와 만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극락왕생하소서.

추.

1. 류시화 시인이 전하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 글을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주위의 제자들이 좀 더 스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이행했으면 스님이 더욱 기뻐하셨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제자들 입장이나 종단 입장에서야 최선을 다해 스님을 살펴드리고 싶었겠지요. 그 마음 모르는 것은 아니나 좀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http://cocopeli.cafe24.com/bbs/view.php?id=heavenlake&no=6743

2. 주낙현 신부님께서 제 글을 직접 읽어 주셨습니다. 한 없이 부끄럽기도 하고, 한 없이 기쁘기도 합니다. 주 신부님의 음성으로 스님의 길을 배웅해 드리니 스님이 더욱 기쁘게 다른 생으로 가셨을 거라 믿습니다. 주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http://viamedia.or.kr/2010/03/11/855

궤변의 달인, 노회찬

궤변의 달인, 노회찬

조선일보와 노회찬은 양립할 수 있을까? 얼핏 보면 이 둘의 사상이 극과 극으로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일보와 노회찬은 분명히 양립할 수 있다. 언젠가 노회찬이 밝혔듯이, 노회찬은 30년간 조선일보를 구독해온 애독자다. 따라서 그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런 정서적 거부감이 없다.

노회찬을 아직도 진보 진영의 대표 인물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노회찬의 조선일보 생일 잔치 참석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은 노회찬 잘못이 아니고, 노회찬을 진보인사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잘못이다. 노회찬은 본인이 밝혔듯이 조선일보의 30년 애독자이기 때문이다. 애독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신문의 창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뭐가 대수인가.

파문이 일자 노회찬은 자신의 블로그에 궤변으로 얼룩진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내가 노회찬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창간 행사에 간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말들을 지껄인 것이 문제다. 노회찬은 겉으로 선명한 진보 정치인의 이미지를 지켜나가고 싶은 동시에 속으로 조선일보 30년 애독자로서의 애정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노회찬은 변명 중에 몹시 거슬리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합리화다.

일부에서 저의 그날 강연을 놓고 ‘조선일보의 30년 애독자로서 조선일보를 최고의 신문으로 고무찬양한 강연’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평양을 방문한 한 교수가 방명록에 덕담 한마디 쓴 것에 대해 북한을 고무찬양한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조선일보가 기사를 쓰기 전의 일입니다. 강연의 주요 내용은 온데 간데 없고 덕담 중 몇마디로 저의 철학과 소신과 강연내용을 왜곡한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다고 항의하니 ‘아니면 말고’라는 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 안에도 ‘조선일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옛말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조선일보와 싸우면서, 싸우는 동기가 되었던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닮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노회찬, 감사와 함께 사과드립니다]

자기 행위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다. 겉으로는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선일보를 애독한다. 그러면서도 선명한 진보 정치인인듯 행세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이중성을 몹시 싫어한다.

예를 들어, 어떤 (말로만) 항일 독립 투사가 일본 천황의 생일 초대에 참석해서 천황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건배를 했다면 그는 진정한 독립 투사인가, 아닌가? 사람들이 그가 천황의 생일 잔치 참석한 것을 비난하자, 그는 “천황과 대화하면서 그를 변화시키러 간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우리 안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그의 진정성을 믿어 주겠는가?

예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니다. 언론을 가장한 정치집단이면서 사익추구집단이다. 그들의 이념은 보수도 아니고 오로지 “기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친일 반동 기회주의 집단의 본류 중에 하나가 조선일보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포용의 대상도 아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조선일보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조선일보를 인정하느냐, 하지않느냐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진정성을 판별받게 되는 것이다.

노회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제발 담백하게 살라는 것이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애독자라고 해서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건 노회찬의 자유다. 하지만 괜히 말도 않되는 “우리 안에도 ‘조선일보’가 있다는 생각” 따위의 변명은 정말 보기도 싫고, 견디기도 힘들다. 조선일보를 읽고 조선일보를 위해 건배하는 것 다 좋은데, (우리 인간적으로) 제발 선명한 척, 진보인 척은 하지 말자.

사실 시간 내가면서 노회찬에 대한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창선의 “조선일보 기념식 참석, 노회찬을 위한 변명” 을 읽고는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유창선, 이사람은 또 뭐냐? 안습이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인가 보다.

인디언들의 몇 가지 가르침

인디언들의 몇 가지 가르침

아침에 눈을 뜨거나 저녁에 잠들기 전에 뭇 생명들과 그대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 감사하라. 위대한 정령이 그대에게 준 많은 좋은 것들과 날마다 조금씩 더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라. 어제 그대가 한 행동과 생각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구하라.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 이로움이 될 일들을 찾으라.

대지와 대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의 어머니로 여기라. 광물 세계, 식물 세계, 동물 세계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어머니 대지를 더럽히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지혜를 갖고 어머니 대지를 보호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한결같이 진실되어야 한다.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인류 전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인류 전체를 존중하는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과 부족들은 하나의 들판에서 피어난 서로 다른 색깔의 꽃들과 같다. 모두가 아름답다. 위대한 정령의 자식들로서 모두가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일에 있어 절제와 조화를 중요시 여기라.

삶에서 그대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과, 그대를 파괴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다.

그대의 마음이 안내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르라.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오는 해답에 마음을 열어 두라. 해답은 기도를 통해, 꿈을 통해, 또는 홀로 고요히 있는 시간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지혜로운 어른들과 친구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그것은 찾아온다.

<아메리카 인디언 도덕률, 류시화 역>

Each morning upon rising, and each evening before sleeping, give thanks for the life within you and for all life, for the good things the Creator has given you and for the opportunity to grow a little more each day. Consider your thoughts and actions of the past day and seek for the courage and strength to be a better person. Seek for the things that will benefit others (everyone).

Treat the earth and all of her aspects as your mother. Show deep respect for the mineral world, the plant world, and the animal world. Do nothing to pollute our Mother, rise up with wisdom to defend her.

Be truthful at all times, and under all conditions.

The hurt of one is the hurt of all, the honor of one is the honor of all.

All the races and tribes in the world are like the different colored flowers of one meadow. All are beautiful. As children of the Creator they must all be respected.

Observe moderation and balance in all things.

Know those things that lead to your well-being, and those things that lead to your destruction.

Listen to and follow the guidance given to your heart. Expect guidance to come in many forms; in prayer, in dreams, in times of quiet solitude, and in the words and deeds of wise Elders and friends.

<Native American Traditional Code of Ethics, Intertribal Times, October 1994>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인류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진보된 종족이었다. 백인들은 그들을 야만인 또는 미개인이라 불렀다. 백인들은 그들의 터전을 빼앗고, 그들을 몰살시켰다.

그들은 사라졌고, 그들의 정신만이 화석처럼 남겨져 있다.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장자 외편 달생(達生)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以瓦注者巧, 以鉤注者憚, 以黃金注者殙. 其巧一也, 而有所矜. 則重外也. 凡外重者內拙.

질그릇으로 내기 활을 쏘면 솜씨가 좋아 잘 맞는다. 띠쇠로 내기 활을 쏘면 주저하여 잘 안 맞게 된다. 황금으로 내기 활을 쏘면 마음이 혼란하여 전혀 안 맞게 된다. 그 재주는 마찬가지인데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외물만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모두 외물만 소중히 한다면 안에 있는 정신은 옹졸해지고 만다.

오쇼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로 번역했다.

궁수가 재미로 활을 쏠 때는
그의 온 기술을 다해서 쏜다.
만일 그가 청동으로 된 상패를 얻기 위해 활을 쏜다면
그는 어느새 신경이 예민해진다.
만일 그가 금상을 받기 위해 활을 쏜다면
그는 눈이 멀게 된다.
아니면 두 개의 과녁을 본다.
그는 그의 마음에서 이미 빗나가 있다.

그의 기술은 변함이 없으나
상이 그를 분열시킨다.
그는 근심한다.
그는 활 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을 더 많이 생각한다.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그의 힘을 다 고갈시켜 버린다.

<오쇼, 이겨야 할 필요>

이규혁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 구절이 떠올랐다. 지난 20년간 스케이팅은 그에게 기쁨이었고, 자유였고, 삶이었다. 그는 수많은 대회에 나가 때로는 우승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떨어지기도 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언제나 이길 수도 없는 것이고, 때로는 이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스케이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20년간의 과정을 즐겼다면 결과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눈물을 흘릴 이유도 없다. 그는 이미 승리한 것이고, 언제나 승리한 삶이었다. 그걸 깨닫기만 한다면 금메달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기는 일보다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활을 쏘는 일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깨닫게 되면 삶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 된다.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시사인 고재열 기자의 “우리에겐 왜 스티브잡스가 없을까”를 재미있게 읽었다. 이 기사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시장을 읽지 못했고, 소비자와 소통을 하지 못했으며, 철학이 부재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만들 수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다 맞는 얘기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나라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지배계층은)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을 원하지도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적인 경영감각으로 거의 죽어가는 애플을 세계 최고의 IT 기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티브 잡스는 양부모 밑에서 자랐고, 대학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 컴퓨터를 만들어 승승장구하다 애플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새로운 운영체제를 만들고, 픽사(Pixar)라는 회사를 만들어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다가 다시 애플의 CEO로 영입되어 오늘날 같은 IT 업계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학벌도 없고, 돈도 없고, 집안 배경도 없는 이런 사람이 상상력과 아이디어 하나로 회사를 차렸다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스티브 잡스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능 하나로 과연 한국에서 IT 업계의 선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아주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중국에서도 부러워할 정도의 식견을 가진 천재들이 있었다. 그 많은 천재들이 다 어떻게 되었나? 다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몇 십년 간 귀양살이 하면서 다 거세되지 않았는가? 조선 세종 때와 정조 때 잠깐을 제외하고 그런 재능있는 사람들이 대접받고 자기 재능을 꽃피웠던 적이 있었던가? 일제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는 또 어땠는가? 과연 능력있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성공한 때가 있었는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딱 한 번 예외적인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물어뜯고 죽인 것은 누구인가? 노무현 대통령을 과연 대통령으로 인정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나?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려면 누구처럼 아버지가 재벌이고 부자라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 사람이거나, 누구처럼 공부를 잘해 일류 대학 나오고 일류 대학 교수와 총장까지 해먹으면서 731부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거나, 누구처럼 거짓말을 너무도 잘해 자기 자신조차 속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상상력과 재능이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듣보잡”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겐 왜 스티브잡스가 없을까?”라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자해 행위다.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은 세계 일류 기업이 될 수 없고, 일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없으며, 일류 지도자를 키울 수도 없다.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은 나올 수 없고, 아이폰 같은 제품도 만들어질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래도 무슨 방법이 없나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 봐선 “없다”. 혹시 조중동이 폐간되거나 한나라당이 없어지거나 뉴라이트가 해체되면 조금 희망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일이 과연 벌어지기야 하겠는가. 조선 후기 이후로 수백 년간 권력과 금력을 잡아온 집단이, 나라를 팔아 권력을 유지한 집단이 아직까지도 저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데, 그런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하겠는가? 혹시 모르겠다. 국민들이 정신차리고 선거에 참여해서 제대로된 정치인들을 지도자로 세우면 어떨지.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블로깅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

블로깅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떠있는 것처럼 인터넷에는 수많은 블로그들이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한 블로그,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블로그,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블로그 등등, 그 블로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 똑같은 별이 없듯이 블로그계의 수많은 블로그들도 똑같은 것은 없다. 이런 이유로 블로그계는 아름다운 것이다.

블로그를 시작한지 3년이 조금 넘었다. 숨을 쉴 공간이 필요했고,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철저히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이 블로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소요유”를 위한 공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 노래, 책 등을 올려놓고 내가 주로 감상하곤 했다. 어쩌다 이 블로그를 지나치는 나그네가 있으면 그 나그네와도 가끔 얘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몇몇 좋은 벗들도 알게 되었다. 미리내님, 민노씨님, 도아님, 아거님, CeeKay님, SoandSo님 등등… 내가 알고자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를 알고자했던 것도 아닐테지만, 우연과 필연의 그물 속에서 공감과 관심으로 (물론 나의 일방적인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블로그 이웃이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세웠던 원칙은 “독립형”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내 블로그에서 나의 생각을 풀어놓았는데, 누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글을 지웠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 블로그에 대해 전적인 권한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네이버나 다음 같은 한국의 포탈을 믿을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물론, 준법이라는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서슴없이 계정을 정지시킬 수도 있고, 글을 지우거나 수정할 수도 있는 그런 집단이기 때문에, 나는 굳이 나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해외) 서버를 구입하고 워드프레스를 설치했다.

또하나 생각한 원칙은 블로그의 정체성을 철저히 “소요유”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블로그라는 것은 인터넷에 “공개”된 공간이다. 아무리 블로거가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와서 글을 읽고 그들의 생각을 보탤 수 있기 때문에 흔히 블로거들은 다른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검열” 기제가 발동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맞닥드리는 것도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하여 나의 현실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소요유”의 생각만을 담기로 했다. (이런 이유로 민노씨님이 내 블로그에서 벽을 쌓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주낙현 신부님의 “블로깅 – 변명어린 잡감”이란 글을 읽었다.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신부님이 꽤 마음 고생을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 신부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성공회가 무엇인지도 알았고, 특히, 신부님의 “신앙인, 그 낯선 이방인” 같은 설교를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 땅에도 정말 훌륭한 성직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런 훌륭한 성직자들이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나의 소박한 바람은 내가 신부님의 블로그 글을 보고 기뻤듯이 신부님도 블로깅을 통해 그만큼 기쁨을 누리시길 바라는 것이고, 가끔 꾸밈없고 담백한 말씀으로 나같은 못난 중생을 일깨워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블로깅을 통해 좀 더 자유로와져야 하고, 블로그로 인한 소통과 공감을 통해 좀 더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이거니와 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임마뉴엘 스베덴보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과 어깨를 나란히할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는 57세 때부터 27년간 지상과 영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고, 그것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가 신을 버리고 과학을 추종하는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과학은 놀라운 기적을 인류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절대로 못합니다. 첫째 현미경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둘째 싹트는 보리알 하나도 생명을 가진 것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p.63>

인간유전자 염기서열을 판독해낸다는 인간의 과학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말처럼 생명을 가진 것은 짚신벌레 한마리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신이기에 “신은 없다” 또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과학으로 볼 수 없으면 정말 없는 것인가. 인간의 과학이 그만큼 완전한 것인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갠지즈강의 모래알 몇 개뿐이다. 진실로 인간들은 신 앞에, 그리고 신이 창조한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들의 오만은 파멸을 불러온다. 신은 언제나 그것을 경고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못들은 체 하거나 실제로 듣지 못한다. 그 소통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