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을 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 고요함에 대하여]

야마오 산세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라 말한다. 수양이 부족한 나는 때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때로는 가슴에 담아 둔 말을 참지 못한다. 때로는 말이 너무 많고, 때로는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쏟아낸다.

산의 고요함을 닮아야 할텐데, 나무와 바위의 침묵을 배워야 할텐데,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가 말했다.

한겨레가 부른 “놈현”이라는 애칭

한겨레가 부른 “놈현”이라는 애칭

2주 전쯤 한겨레신문은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장사를 넘어라“라는 글을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정론지를 추구하는 언론이 서거한 전직 대통령을 두고 “놈현”, “관장사”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분노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한겨레는 편집국장 성한용의 명의로 사과문을 올린다. 성한용이라는 자가 한겨레 편집국장으로 있는지 나는 이때 처음 알았으며, 성한용이라면 능히 “놈현”이라는 표현을 쓰고도 남을 작자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사과문에는 어떠한 진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한겨레에 대한 기대를 진작에 접은 터라 분노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필화사건은 월드컵에 묻혀버렸고, 그런대로 마무리가 되는 듯 했는데, 한겨레는 꽤나 속히 뒤틀렸던 모양이다. 한겨레는 오늘 “놈현”을 “놈현”이라고 불렀는데 뭐가 잘못이냐, 오히려 사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식의 칼럼을 올렸다. 이 칼럼을 쓴 언론인 김선주는 자신은 “놈현”을 노무현의 애칭으로 부른다고 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 여자도 성한용과 한통속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놈현’이라고도 말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쪽에서 놈 자와 현 자를 합해서 악의적으로 만든 말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나 나름의 애칭일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편하고 길고 어감상 매끄럽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도 ‘명바기’ 혹은 ‘이명바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김선주, 말조심 글조심 … 어렵네]

이런 글은 한마디로 개같은 글이다. 아니 개만도 못한 글이다. 반노들이 만들어낸 악의적인 말이라고 해놓고도 따지지 않는단다. 나름대로 애칭이라고 버젓이 일간지 지면에 써갈긴다. 김선주는 더 나아가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이 정곡을 찌르는 적절한 제목이었다고 말한다.

재론되는 것을 어느 쪽도 원하지 않겠지만 나로선 이 사건의 발단에서 마무리까지가 적절했다고 볼 수 없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곡을 찔렀네…제목 잘 뽑았네’ 했던 것이 첫 느낌이었다.

요즘 한겨레는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얘기한다. 나도 한겨레에 대한 비판 글을 많이 썼지만, 한번도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표현한 적은 없다. “한걸레”라는 것이 결코 명칭이나 애칭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지난 20여년간 진보 진영의 정론지라는 타이틀을 독점해 놓고, 그들은 아무런 성과도 업적도 내놓지 못하고 오로지 조중동 따라하기만을 반복한다. 그들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치졸함은 조중동 못지 않다.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을 붙이고 성한용과 그 일당들은 얼마나 낄낄거렸을까. 그들의 비아냥 섞인 미소가 눈에 선하다.

그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관장사”로 비하했다. 그런데 정작 노무현의 죽음을 팔아먹기 바쁜 족속들은 오마이뉴스나 한겨레 같은 자칭 진보 정론지들이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그들은 “놈현 관장사”로 표현했다.

참여정부 시절 성한용과 그 일당들의 분탕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도 그들은 끝없이 노무현을 조롱했고, 노무현이 죽고 나서도 그들의 비하와 저주는 그칠 줄 몰랐다. 끝없는 횡설수설과 궤변도 그들의 위선을 감추지는 못했다.

김선주는 박정희는 “박통”으로 부를 수 있지만, 노무현은 “노통”이라고 부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놈현” 또는 “노무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단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영어 이니셜이 아니라면 ‘박통’처럼 부르기 쉽고 적절한 이니셜을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쪽에서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놈현’ 혹은 ‘노무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어 이니셜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도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DJ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MB라 부른다. 김대중을 때중이라고 부른 적도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부른 적도 없지만, 노무현에 대해서는 “놈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개만도 못한 족속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진보 정론지임을 자처한다.

이제 한겨레에 대해서는 분노할 필요도 비판하거나 비난할 필요도 없다. 분노나 비판이나 비난은 어느 정도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짖어대면 그냥 개만도 못한 족속들이 짖어대는구나 하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냥 제 풀에 지쳐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정론지는 이제 “딴지일보” 하나 남았다. 주간지로는 “시사인” 정도일 것이고.

<덧붙임>

참여정부 시절 한겨레의 분탕질을 정리한다. 아래 글들은 한겨레를 읽고 열받아 쓴 글들이다. 이제는 더이상 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제대로 망치는 방법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제대로 망치는 방법

아르헨티나와 우리나라의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이겨야 본전이고, 우리나라는 져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였다.

허정무는 정말 창의력이 뛰어난 감독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에서 굳이 잃을 것을 만들어내는 그의 놀라운 창의력에는 스티브 잡스조차 박수를 칠 만하다. 그는 경기 시작부터 선수들이 정상적으로 뛸 수 없게 철저히 거세시키는 전술을 펼쳤다. 그리스 전에서 펄펄 날던 선수들은 온데간데 없이 모두 사라졌다. 같은 선수들을 데리고 이렇게 180도 다른 경기를 만들어내는 허정무의 능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번 경기에서 무려 5골이나 났어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골이 없었다. 모두가 버벅대다가 나온 골이었기에 4대1 대승을 거둔 아르헨티나도 개운하지 않을 것 같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도 이 경기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였다. 아무도 북한이 브라질을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2대1 브라질의 승리였지만, 북한은 그 경기에서 너무나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정신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브라질을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그 경기에서 나온 3골은 모두가 아름다운 골이었고, 골키퍼가 어쩔 수 없는 골다운 골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질 때 지더라도 정상적인 경기를 했어야 했다. 아르헨티나는 메시를 제외하고 그다지 강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팀이었다. 물론, 경기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국이 정상적인 경기를 하지 않으니 그들의 움직임이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경기 결과를 떠나 이런 졸전의 책임은 100% 감독에게 있다. 감독의 잔머리와 온정주의가 어떻게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망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허정무 이후의 축구 대표팀을 맡을 감독과 다른 나라 축구 감독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경기라 할 수 있다.

축구는 운동 경기일 뿐이다.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다. 하지만 질 때 지더라도, 어떻게 지느냐 그 과정이 결과 못지 않게, 아니 때로는 결과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즐긴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는 그런 것을 보여줬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은 조직을 쉽게 망칠 수 있다. 그것은 축구 경기뿐만 아니고, 기업이나 정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2년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 어제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이지리아와의 다음 경기에서 허정무는 어떤 판단을 할까? 그의 결정이 자못 궁금해진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라는 소설에는 “행복”라는 화두를 지니고 여행을 떠나는 정신과 의사 꾸뻬 씨가 등장한다. 꾸뻬 씨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행복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여행을 통해 꾸뻬 씨가 배우게 된 23가지의 지혜들은 행복에 관한 다양한 단면들을 보여준다.

  1. 행복의 첫번째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2.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 찾아온다.
  3.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4.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5. 행복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산속을 걷는 것이다.
  6.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7.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8.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9. 행복은 자기 가족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10.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11.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12.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
  13.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14.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15.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16. 행복은 살아 있음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것이다.
  17.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18. 태양과 바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19. 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20.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21. 행복의 가장 큰 적은 경쟁심이다.
  22. 여성은 남성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더 배려할 줄 안다.
  23.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또는 경쟁하지 않고)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며, 그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다른 이들의 행복으로 완성된다.

꾸뻬 씨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늙은 스님은 왜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는지를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행복을 찾아 늘 과거나 미래로 달려가지요. 그렇게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 p. 190>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 한 조각 바라보면서,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피어난 들꽃 한송이를 바라보면서, 무더위를 식히는 한줄기 소나기를 바라보면서, 저녁 밥에 스며있는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길을 느끼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무한히 감사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파랑새다.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블로그를 우연히 찾은 당신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할 것이며, 그로 인해 나도 무한한 행복감에 빠지리라.

아이폰4, 6개월을 기다린 보람

아이폰4, 6개월을 기다린 보람

아이폰4

작년 11월 말, 아이폰이 우리나라에 처음 출시되었을 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을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고,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폰 사용을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 아이폰을 쓰고 있지 않다. 나 같은 애플빠가 아직도 아이폰을 쓰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처다본다.

작년 말에 바쁜 일정 관계로 휴대전화를 교체할 시간이 없었다. 올 2월 초나 되어서나 조금 여유가 생겼는데, 그때는 이미 아이폰 4G가 여름에 출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아이폰 3Gs를 사용하느냐 아니면 6개월을 기다렸다가 아이폰 4G를 쓰느냐, 그 당시 이런 별 것 아닌 고민을 약 30분 정도 했던 기억이 있다.

결론은 “기다리자”였다. iPod touch를 가지고 있었고,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는 편도 아닐 뿐더러, 한번 가입을 하면 2년 이상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을 기다리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이폰으로 바꿔가기 시작했을 때도 오직 아이폰4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엊그제 잡스 형님께서 새로운 아이폰을 들고 나오셨다. 늘 그렇듯이 잡스 형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인 일인지 KT에서도 다음달에 아이폰4를 출시한다고 하니 나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은 듯하다.

아이폰 출시 7개월만에 벌써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아이폰4가 나오면 올해 안에 100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아이폰을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삼성과 SKT에게도 큰 자극이 될 것이고 위기가 될 것이다. 한때 IT강국, 인터넷강국이라 불렸던 우리나라가 불과 2~3년만에 삽질공화국이 되었는데, 이 삽질공화국에게도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많은 젊은이들이 더 진보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기술결정론자는 아니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처럼 방송국 사장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도 없고, 하루에 1000만부의 쓰레기 신문을 찍어낼 수도 없지만, 인터넷과 아이폰 같은 도구를 이용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되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삽질로는 만들 수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잡스 형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투표 전에 읽으면 좋은 글 3(+1)종 세트

투표 전에 읽으면 좋은 글 3(+1)종 세트

제가 쓴 글을 제가 자랑하고 홍보하기가 거시기하지만, 사실 저는 조급합니다. 이번 선거가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도 저들이 승리한다면, 저들은 개헌 카드를 들고 나올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유시민, 한명숙이라는 대표 선수를 출전시키고도 저들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아니 엄밀히 얘기해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겐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6월 2일 투표 전에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지난 총선이나 보선 때 쓴 글들이지만, 이번 선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되기에 한 번씩 읽어보시고 주위의 분들에게도 권해 주십시오. 뻔뻔하게 말씀드리지만, 세련되지 못한 표현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잘쓴 글들입니다.

1. 네 가진대로 찍어라

김규항 씨가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에 맞대응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도 밝혔지만, 저는 이념을 믿는 편이 아닙니다. 이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수많은 변절자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 투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지금 본인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둘러 보십시오. 답이 나옵니다.

2. 아직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당신에게

한나라당은 아무나 지지할 수 있는 그런 정당이 아님을 밝힌 글입니다. 이 글은 농민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서민 등이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노동자나 농민, 그리고 서민들이 있으면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해 주십시오.

2-1.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 (2012년 4월 11일 총선 전 추가)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온갖 못된 짓들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역사를 추적해 본 글입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투표한다는 것이 왜 역사적으로 죄를 짓는 일인지 살펴 본 글입니다.

3. 왜 서민들은 이명박을 지지할 수 밖에 없을까

소위 “계급 배반” 투표 행위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소위 강부자로 일컬어지는 1% 특권층만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서민들이 왜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지를 분석했습니다. 서민들이 이 글을 읽고, 저들이 만들어놓은 매트릭스로부터 깨어나오길 바랍니다.

이 글들을 읽고, 100명 아니 단 10명만이라도 투표에 참여해서 제대로된 주권을 행사한다면, 이 블로그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더 이상 노무현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도 없습니다. 유시민, 한명숙이 나서고는 있지만 힘이 부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직 투표만이 저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투표만 잘하면 촛불을 들 필요도, 유모차를 끌고 나올 필요도, 지못미를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입니다. 찍을 사람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놈이 그놈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하고 상관없다고도 말하지 마십시오. 찍을 사람도 있고, 그놈이 그놈도 아닐 뿐더러, 분명 당신하고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6월 2일, 당신의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당신의 자식들을 위하여 제대로된 투표 한 번 합시다. 그리고 우리 환하게 웃어 봅시다. 희망을 만들어 봅시다. 우리들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젊은이들, 더 이상 투표를 구걸하지 않겠다

젊은이들, 더 이상 투표를 구걸하지 않겠다

며칠 전,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한 무리의 군인 아저씨들을 만났다. 군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저씨들로 불린다. 이 군인 아저씨들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들이었다. 어렸을 때, 군인 아저씨들한테 위문 편지를 쓸 때는 늠름하고 씩씩한 모습을 연상했었는데, 정작 군인 아저씨들은 나이 어린, 갓 피어난 청년들이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중년의 나는, 동생 같기도 하고 조카 같기도 한 이 청년들을 보면 울컥해지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들은 꿈을 먹고 살아가야할 청춘이 있건만, 그 청춘은 온통 회색빛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앞세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땅은 늘 그렇게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언제나 척박했고 회색이었다.

예전에 나는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며 이런 글들을 썼었다.

대체로 좋은 글들이지만, 이런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젊은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나는 모른다.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는 세상을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자기 앞가림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인 세상을 원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방 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최근 10년 사이에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실상 국민들이 제대로 투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강물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남북관계를 더 이상 파탄에 빠뜨리지 않고 전쟁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더 이상 20대, 30대 젊은이들에게 투표하라고 구걸하지도, 강요하지도, 부탁하지도 않기로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더러는 동의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있겠으나, 대체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단지 특정 정치 세력을 선택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선거가 되었다.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선거는 경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버렸다.

찍을 사람이 없어서, 또는 그놈이 그놈이니까, 바빠서,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등등 젊은이들의 판단과 변명은 여러가지일 수 있겠으나, 객관적 현실은 그들의 판단이나 변명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 의지”이다. 우리의 내일은 곧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 투표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유로부터 생겨난 내일이 그들에게 오늘보다는 조금 더 살아갈 만한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구걸하거나 부탁하지 않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은 깊이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아닌 권리 같지만, 그것이 모이고 모이면 결국 우리는 끝내 바다에 도달할 수 있을테니까.

이제 일주일 남았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어느 인디언 예언자는  탐욕에 눈이 먼 세상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Only after the last tree has been cut down. Only after the last river has been poisoned. Only after the last fish has been caught. Only then will you find that money cannot be eaten.

[Cree Indian Prophecy]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물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이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크리족 인디언 예언자]

사람들은 진정 무엇이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된다. 잃고 나서 깨닫게 된다면 그나마도 다행이다. 그것을 잃고 나서도 무엇을 잃었는지,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2009년 5월 23일, 그는 홀연히 세상을 떴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몇몇 사람들은 슬퍼했지만, 많은 이들은 정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정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최소한의 상식조차도 버거워하는 땅에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정의가 이기는 역사를 만들자고 했다. 특권과 반칙을 물리치자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처음으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보여줬다.

몇몇에게는 감동이었고, 몇몇에게는 당황이었고, 그리고 몇몇 특권층에게는 경악이었다.

경악한 이들은 그를 죽여야 했다. 그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지워야 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아있지 않았고, 더 이상 이 땅을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홀로 세상을 떴다.

몇몇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들을 그를 욕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세상은 가라앉았다.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창궐했다. 나무들이 사라지고, 강이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거짓만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유일한 지혜로 군림했다.

세상에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얘기했다.

사람들은 정의 보다는 돈을, 민주주의 보다는 특권주의를, 그리고 노무현 보다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1년이 지나도 나는 그의 사진을 보고,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 나무였고, 마지막 강물이었다. 그는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마지막 강물을 잃은 나는 어떻게 바다에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울고만 있다. 마지막 강물이었던 그가 보고 싶다.

싱그럽게 푸른 5월은 가장 슬픈 계절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을 들을 때면 비가 와야 한다. 하염없이 슬프게 비가 와야 한다.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고, 그들의 한이 눈물이 되어 온 산천을 적셔야 한다.

30년이 흘렀어도 그들은 눈을 감고 안식할 수 없다. 그들을 죽인 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 죽어서도 쉴 수 없는 사람들, 한때는 이 땅의 민주주의의 물줄기가 되었던 광주. 비만 슬프게 내린다.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경건하게 듣고 불러야 할 그 슬픈 행진곡은 이제 “방아타령”으로 바뀌어 버렸다. 광주 망월동 묘지의 상석을 밟았던 자, 광주의 영령들 앞에서 파안대소 했던 자가 대통령이 되자 광주의 영혼들은 다시 울어야 했다. 세상은 잔인했고, 그리고 무심했다.

전태일, 광주, 그리고 노무현. 앞서 간 사람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슬픈 행진곡을 나지막히 불러주는 것뿐이다. 산 자들은 그들을 따를 것인가. 정녕 그들을 따를 것인가.

슬픈 비만 애처로이 내리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님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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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스승의 날,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지난 주말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스승의 날이었다. 스승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스승의 날을 기념한다니, 이런 부조리한 블랙 코메디가 또 어디 있을까.

급진적 교육 사상가인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그의 책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Universal education through schooling is not feasible. It would be no more feasible if it were attempted by means of alternative institutions built on the style of present schools. Neither new attitudes of teachers toward their pupils nor the proliferation of educational hardware or software (in classroom or bedroom), nor finally the attempt to expand the pedagogue’s responsibility until it engulfs his pupils’ lifetimes will deliver universal education. The current search for new educational funnels must be reversed into the search for their institutional inverse: educational webs which heighten the opportunity for each one to transform each moment of his living into one of learning, sharing, and caring.

학교를 통한 보편적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보편적 교육은 현행 학교 형태 위해 세워진 어떠한 대안교육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학생에 대한 교사들의 새로운 태도, 교육적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보급, 학생들의 일생 동안 교사의 교육적 책임을 넓힌다고 해도 보편적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주입식 교육울 추구하는 현행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하는 교육 네트워크로 전환해야 한다.

일리히는 제도화된 학교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그는 학교에는 교육이 없고, 교회에는 신과 종교가 없으며, 병원에는 치유가 없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심오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2010년 한국에서는 일리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교육열이 가장 높고,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다 건 사람들이고, 자녀 교육에 관한 한 이들은 미쳤다. 교육이라고 해봤자 그들이 얘기하는 것은 속칭 “일류 대학 들어가기”뿐인데도 말이다.

한국은 대학 졸업장으로 계급이 분화되는 사회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인생의 출발선이 달라지고, 그들을 보는 눈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대학 진학에 목숨을 걸고 있고, 초중고 교육이라는 것은 오직 일류 대학 들어가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학교에서는 오직 경쟁만을 가르친다. 그것도 얼마나 시험 문제를 잘 푸느냐에 따른 경쟁. 학교에는 교육이 없고, 오직 훈육과 조련만이 있다. 아이들은 시험보는 기계, 문제 푸는 기계로 전락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오직 이런 과정을 통해 이 나라가 원하는 인력들을 생산한다.

이런 과정을 우수하게 통과한 소수의 아이들은 일류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사회 지배 계층으로 진입하게 되고, 이 경쟁에서 탈락한 대다수 아이들은 평생을 루저(Loser)로 살아가게 된다. 삶에 대한 열정도 없고, 고민도 없고, 성찰도 없이 그저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파편화된 삶을 영위한다.

한국의 학교들은 그런 인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들을 생산한다. 대학은 졸업장을 미끼로 장사를 하고 있고, 중고등학교는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견뎌야하는 훈련소이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서 군사부일체 운운하면서 스승의 날을 꼬박꼬박 챙기는 것을 보면,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원을 보는 것 같다.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이 나라에 어떤 스승이 있을까? 아이들을 성적과 대학 진학이라는 올가미로 세뇌하는 스승들 외에 어떤 스승들이 있을까? 아이들에게 꽃 받을 자격이 있는 스승들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 이 거대한 집단 정신 이상과 집단 사기극을 알아볼 수 있는 스승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스승의 날은 이 땅의 스승들에게 가장 부끄러운 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날이 하루 빨리 없어지길 바란다. 아이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드는 나라에서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엽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