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6일이나 되는 추석 연휴 내내 한없이 빈둥거렸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이나 읽어보자고 계획 아닌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찾아먹고, 평소에 자지않던 낮잠도 실컷 잤는데, 밤에는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 체중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는 딸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뒷산을 다녀왔으며, 하루는 고궁에 나갔다 하릴없이 쏘다닌 것이 전부였다.

정현종의 <시간의 게으름>을 읽고 행복했다. 6일이 살과 같이 흘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주세요.

<정현종, 시간의 게으름>

이런 것은 “저주”라 부를 만하다

이런 것은 “저주”라 부를 만하다

만약 화성 표면에서 일직선으로 된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인간들은 화성에서 생명체가 산다는 또는 살았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자연과 우주는 일직선으로 된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다. 어떤 생명체라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인 존재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런 직선은 나타나지 않는다. 추석 연휴에 서울과 수도권에 물폭탄이라 부를만한 비가 쏟아졌다. 시간 당 거의 100mm의 비가 대여섯 시간 쏟아지니, 도시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기상 관측 이후 100여년만에 처음으로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가 침수되었다. 이런 폭우를 가져온 비구름은 서울을 정확하게 조준한 폭탄처럼 보였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구름이 아니었다. 무언가의 의지가 포함된 듯한 그런 구름이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만했다. 이런 현상을 전문 용어로 “저주”라 부른다. 이 구름 사진을 보면서 나는 문수 스님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추석 연휴 첫날부터 방송에 나와 찌질거리는 자가 있었고, 광화문과 청계천, 그리고 수도권에는 물폭탄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서민들만이 폭우의 피해자가 되었다.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가 아니라, 잊지 못할 슬픈 한가위가 되어버렸다.
꿈이 죽으면 나타나는 징후들

꿈이 죽으면 나타나는 징후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첫번째 소설 <순례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들을 죽일 때 나타나는 첫번째 징후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가장 바빠 보였던 사람조차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 피곤하다고 말하고, 정작 자신들이 하는 게 거의 없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가 너무 짧다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지요.

꿈들이 죽어가는 두번째 징후는,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삶이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모험이라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스스로 현명하고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여깁니다. 아주 적은 것만 기대하는 삶 속에 안주하면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그 세번째 징후는 평화입니다. 삶이 안온한 일요일 한낮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에게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지도,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고는 우리는 자신이 성숙해졌다고 여깁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 문학동네, pp. 78-79>

코엘료의 말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 본다면, 나의 꿈은 이미 죽어 버렸다. 나에게 나타난 징후는 세번째 것인데, 언제부턴가 나는 삶에 대한 기대를 접었던 것 같다. 무엇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지도 않았다. 운이 좋았던 몇몇 경우엔 내 노력보다 훨씬 큰 것을 얻기도 했고, 그렇지 않았던 대부분의 경우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았고, 운이 좋았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삶은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내 곁을 스쳐갈 뿐이었다. 나에게는 열정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저 순간순간 내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내 삶은, 언젠가는 바다로 가겠지만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흐르는 강물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폭포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내가 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삶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가 가버렸다.

나의 꿈은 무엇인가? 코엘료의 말처럼 나의 꿈은 이미 죽어 버린 것인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난지 벌써 한달이 되었다. 아내의 꿈은 코엘료처럼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었다. 아내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꿈을 이룬 후에 아내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오늘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담의 경제적 가치를 24조 6천억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단 이틀간 열리는 회의의 수출 증대 효과가 22조라니 아무리 야바위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틀 동안의 회의를 통해 경제성장률을 2%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11만 2천개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G20 회의를 일주일만 하면 1년 경제성장률을 모두 달성하고도 남는다는 말인데, 뻥을 쳐도 좀 적당히 쳐야 되지 않을까?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금메달 가치는 5조 2천억원이었고, 남아공 월드컵 16강의 가치는 10조 2천억원이었단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세상이다. 그 환산 과정이란 것도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초등학생조차 믿기 어려운 것인데도 기어이 돈으로 바꾸고 보자는 세상이다.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도 헌금의 액수로 측정하는 세상이니 무엇을 더 말하랴.

결국 인간들이란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족속들이다.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부자 되기를 기도하고 대박나기를 기원하는 탐욕의 세월을 보낼 것이다. 필요 이상의 지나친 부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들의 자해는 계속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예수나 붓다도 구원하지 못한 세상인 것을.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

멸족을 눈 앞에 둔 소인족 소녀 아리에티와 심장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소년 쇼우. 따사로운 어느 봄날 그들은 조우한다. 아리에티에게 인간은 공포였고, 쇼우에게 소인족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공포와 호기심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연민이 되었고, 그 연민의 끝은 이별의 쓸쓸함이었다.

아리에티와 쇼우 그들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소인족은 멸족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쇼우는 삶을 지탱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아리에티와 쇼우는 그들이 함께 했던 짧은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삶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언뜻언뜻 희망의 한자락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 안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만날 것이다.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고, 신은 우리를 잊은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신의 아들을 보았다 했지만,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그가 왔다면, 그는 전에 했던 것처럼 아주 위대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도, 그가 한 일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을 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그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들은 그가 했다고 알려진 약속에 매달렸다.

<붉은 구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There was no hope on earth, and God seemed to have forgotten us. Some said they saw the Son of God; others did not see him. If He had come, He would do some great things as He had done before. We doubted it because we had seen neither Him nor His works. The people did not know; they did not care. They snatched at the hope. They screamed like crazy men to Him for mercy. They caught at the promise they heard He had made.

<Red Cloud,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가위에 눌리다

가위에 눌리다

꿈 속에서 나는, 현실에서 내가 자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말하자면, 꿈 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구분되어지지 않았다. 꿈 속의 나는 잠을 자면서 또다른 존재를 느끼게 되는데, 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만, 꿈 속에서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고, 그 존재가 “또다른 나”란 사실을 알았다. 그 존재는 꿈 속에서 자고 있는 나에게 달라붙었다. 꿈 속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현실의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현실의 나는 꿈 속의 나와 동조되어 있었고, 꿈 속의 나는 또다른 나와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나 답답하여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게 되었을 때 가까스로 나는 꿈 속에서 눈을 떴고, 그러자 현실에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눈을 뜨자 꿈 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어 있던 그 존재는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가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가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불리는 하버드에서 최고의 강의를 한다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비껴갈 수 없는 여러 도덕적 딜레마들을 유명한 철학 이론들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좋은 책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할 만하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샌델 교수가 도덕적 책임의 세 가지 범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도대체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가? 인간들의 관념 속이 아니고, 하버드 대학 같은 아름다운 강의실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과연 정의는 존재하고 정의는 승리하는가? 사필귀정이란 말은 진리인가?

엊그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사실상 이라크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4만 여명의 군인과 86만 여명의 민간인 등 총 90만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래 사막에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이런 것이 정의로운 전쟁인가?

15세기 콜럼버스가 오기 전 미국 대륙에는 천만 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백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인디언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고난을 당한다. 15세기에 천 만명이 넘던 인디언들이 20세기에는 불과 20만명 밖에 살아남지 못한다. 6000천만 마리나 있던 들소들은 2천여 마리만 살아 남았다. 백인들의 사악함과 탐욕 앞에 인디언과 들소들은 겨우 멸족만을 면했을 뿐이다. 이들에게 정의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광주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국민들을 죽이고 집권한 전두환은 “정의 사회 구현”이란 표어를 내걸었다. 이 독재자는 호주머니에 29만원을 넣고 다니면서 말년에 아주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이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

인류 역사 상 정의라는 것이 실현된 적이 있었는가? 왜 언제나 힘없는 사람은 죽어야 하고, 고통받아야 하고, 탄압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힘이 정의인가?

힘이 정의인 세상에서 샌델 교수의 책은 한낱 멋진 지적 유희로 끝나 버릴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허지웅 씨와 고재열 씨의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논쟁을 재미있게 보았다. 이것은 기술결정론에 대한 전통적인 논쟁의 2010년판이라 할 수 있다. 트위터는 정보 유통에 대한 강력한 잠재력을 가진 도구인데, 이 도구를 이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앨빈 토플러나 토마스 프리드만 같은 기술결정론자들은 기술의 발전(특히, 정보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그것도 유토피아로 말이다. 기술결정론자들의 장밋빛 환상이다. 과연 정보기술이 발전하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때문에 기술의 발전 자체가 세상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기술 그 자체에 내재된 속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총이라는 도구를 발명했는데, 그 총이라는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죽이는데 사용된다. 총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사람을 살리는 수술을 할 수도 없다. 핵무기는 어떤가? 결국 기술에도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속성 또는 가치가 있다.

인류 역사 상 세상을 바꾼 기술이라는 일컬어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금속 활자, 증기 기관, 인터넷 같은 것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사람들의 사용에 의해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속성이 발현되었고, 결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람”이다. 기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닌 사람이다.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조직된 힘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트위터나 블로그 같은 서비스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사람들을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도구들이다. 때문에 지배계층은 인터넷이라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어떻게 해서든 통제하려 한다. 인터넷이 권력의 분산과 이동에 도움을 주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들의 조직된 힘과 행동이고, 트위터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

감당할 수 없는 절망

문수 스님이 4대강 죽이기에 반대하며 소신공양으로 열반에 드신 이후 그리고 그 소신공양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한 이후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다. 마치 작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맘먹는 충격에 빠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그 소신공양이란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기원이자 저항 행위일 것인데, 문수 스님의 유서는 너무나 소박하고 애처로워 보여 슬펐다. 자기 몸을 나무토막처럼 불태우며 스러져 갔어도, 세상은 아무일 없다는 듯 무심했고, 굴삭기는 여전히 강바닥을 긁어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은 나를 세상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침묵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