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지도층’이 원하는 것 두 가지

‘사회지도층’이 원하는 것 두 가지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연속극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의 주인공 김주원이 유행시킨 말 중 하나가 “사회지도층”이다. 그가 속해 있다는 사회지도층이 이 사회에서 뭘 지도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다른 사회지도층과는 다르게 아주 정직하게 사회지도층이 뭘 원하는지 밝힌다.

“사회, 경제 체제에서 노동 조직에서의 부의 분배방식과 수량의 다툼에 따라 생기는 인간집단이 뭔지 알아? 바로 계급이야. 그들이 1년에 1억씩 쓰면서 원하는 건 딱 두 가지야. 불평등과 차별. 군림하고 지배할 수 없다면 철저히 차별받기를 원한다고. 그게 그들의 순리고 상식이야.”

사회지도층을 다른 말로 하면 지배계급이다. 이 사회의 지배계급이 원하는 것은 김주원의 말대로 불평등과 차별이다. 예를 들어, 의무급식(또는 무상급식이라고 하는데, 의무급식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에 대한 논란을 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명박이나 오세훈 등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지배계급들은 의무급식에 대해 결사반대한다.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의무급식을 하게 되면 모든 학생들이 같은 품질의 점심을 먹게 되는데, 이런 보편적 식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의무급식에 당연히 국가재정이 들어가게 되고, 그것은 지배계급의 조세부담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지의 보편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복지란 사회지도층이 소외된 이웃들에게 하사하거나 시혜하는 선물이어야 하는데, 감히 사회지도층이 소외된 이웃들과 같은 품질의 점심을 먹다니 이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상황이다. 의무급식은 그들이 원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허무는 첫걸음이기 때문에 이것이 성공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지도층과 소외된 이웃들과의 간극이 좁혀질 것이고 궁극적으로 차별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지배계급들은 불평등과 차별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이 사회에서 군림하려 하지만, 그들은 이 사회의 다른 계급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다. 때문에 이 땅의 지배계급은 일종의 자폐집단이라 정의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만큼 불쌍한 것이 있을까.

불쌍하고 가련한 자폐집단, 사회지도층은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사회지도층도 아니면서 그들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추종하는 소외된 이웃들이다. 이명박 같은 사회지도층이 소외된 이웃들을 요리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것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들은 세상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다.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자폐집단인 사회지도층과 자기 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을 상실한 소외된 이웃들. 2011년 대한민국은 불쌍한 두 집단이 만들어낸 서럽고도 아름다운 매트릭스가 되었다.

들풀처럼 살라

들풀처럼 살라

시간은 존재하는가?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 불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시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관념 중 하나다. 지구 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간이란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고, 순간을 살뿐이다.

인간들이 던지는 궁극의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인간들 주위를 맴돌았다. 깨달은 몇몇은 실마리를 남긴 채 지구별을 떠났고, 남겨진 자들은 여전히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헤맸다. 남겨진 자들에게 삶은 버거운 짐이었다.

예수가 태어난 지 2011년째 되는 해. 2011은 지극히 인위적이고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이지만, 인간들은 또다시 지속되는 삶 속에 궁극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류시화, 들풀>

산과 들에 있는 풀과 나무와 바위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만 던질 뿐,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이 지구별을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生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리석음이 원죄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잔인한 겨울

잔인한 겨울

흐르는 강이 막혀 버리자, 땅은 기운을 잃고 병들어 갔다. 살을 에는 바람이 불고 눈이 쏟아져 겨울은 깊어 갔지만, 엄동설한에도 역병이 창궐했다.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돌아 죄없는 짐승들만 산 채로 땅에 묻혔다. 인간들은 그런 것을 살처분이라 불렀다.

굴삭기의 삽질 아래 강은 신음하다 죽었고, 헤아릴 수 없는 뭇 생명들이 스러졌다.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 그리고 닭, 오리들이 살처분됐다. 잔인한 겨울이었다.

2011년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으례 하는 인사로도 “희망찬 새해”라 말할 수 없었다.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신음했고,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쳤다.

한무리의 족속들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간들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고, 전세난으로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오래 전에 잊혀진 줄 알았던 전쟁의 고통까지 되풀이되었다.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예견된 것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견된 저주였고, 그 저주는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관심이 불러 온 것이었다.

올 한해 냉정하게 지켜볼 작정이다.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의 끝이 어디일지 그리고 그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2명의 군인과 2명의 민간인이 죽고, 대부분의 연평도 주민들은 인천으로 피난을 나왔다. 북한은 625 전쟁 이후 60년만에 처음으로 남한의 영토를 공격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손자병법에 보면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다. 북한과 남한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를 알 수 없으며 이런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봉건주의 국가이다. 겉으로는 사회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지만, 본질은 김일성-김정일 그리고 그의 아들로 이어지는 봉건왕조인 것이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북한은 지구 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로 남아 있다. 그들의 사상과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본질적으로는 북한 지배층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 더 합당한 이유일 것이다.

북한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은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데, 북한은 이런 초강대국과 맞서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미국은 지난 세기 지구 상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전쟁에 개입한 나라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나 권력을 막강한 군사력으로 끊임없이 짓밟은 나라이다.

그런 미국과 맞서기 위해 북한은 수십년 전부터 핵무기를 개발해 왔으며, 이제는 비공식적인 핵보유국이 되었다. 초강대국 미국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핵을 보유하고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북한은 너무나 잘알고 있기에 북한과 미국이 수교를 하고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60년간 남한에게 있어서 북한은 언제나 위협적 존재였다. 인민들이 굶어죽어 나가도 핵과 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나라가 북한이기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지만, 북한은 가장 위험한 적대국이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뒤, 남한에서는 5년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그 정권의 속성에 따라 남북관계는 냉온탕을 왔다갔다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의 기간은 비록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남북관계가 관리되었던 때였다. 두 번의 정상회담이 있었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이 시작되었다. 일부 극우세력들은 퍼주기라고 비난을 해댔지만, 그때는 그 누구도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전쟁이 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극우세력을 등에 업은 이명박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기존의 정상회담 합의들을 간단하게 무시하였다. 금강산 관광도 중단되고 개성공단 사업도 거의 있으나마나한 일이 되어버렸다.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출구가 없는 북한은 더욱 중국에 붙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권이 천안함 사태의 주범으로 북한을 몰아붙이자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일주일 전의 연평도 포격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더군다나 연평도 앞바다에서의 해상 훈련은 북한을 자극했고, 북한은 전통문을 통해 훈련이 계속되면 포격을 할 것이란 경고를 보냈다. 물론 그 경고는 무시되었고 남한은 3000발이나 되는 포탄을 연평도 앞바다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연평도에 난리가 났다. 북한이 남한 영토에 대해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포격을 한 것이다.

북한의 공격은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권을 살려준 꼴이 되었는데, 이 포격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대포폰으로 민간인을 사찰한 사건과 김윤옥의 뇌물 수수 의혹 등으로 청와대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이런 일련의 스캔들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명박 정권에는 북한의 공격을 적절히 대응할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총리, 집권당 대표, 국정원장, 대부분의 장관들은 모두 병역을 필하지 않은 자들이었고, 국방부 장관이라는 자 또한 북한을 다룰만한 역량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포격이 나면 지하 벙커에 기어 들어가서 사건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정도인 것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일부 극우 쓰레기 언론들을 전쟁을 부추기기에 바빴다. 물론, 그 쓰레기 신문들의 사주들도 대부분 병역면제자들이었다.

북한에게 포격당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전쟁불사를 외치는 자들이 늘고 있는데, 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든지 아니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무책임하게 전쟁을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4명이 죽은 국지적 포격에도 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 전면전이 일어나면 하루에 230만명 이상씩 죽어나가는 참상이 눈앞에 전개된다. 열흘이면 우리 국민 절반 죽는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실을 알고도 전쟁을 하자는 자들은 전쟁이 나면 전용기를 타고 도망갈 수 있는 자들이거나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닌 자들인 것이다.

전쟁 그것은 한미디로 지옥이다. 극악한 살인이고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다. 이 땅에서 두번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한반도에 단 하나의 당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핵무기가 있는 북한을 제압할 수 없다.

남한의 치명적인 약점은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들이 지극히 부도덕하고 게다가 너무나 무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포탄과 보온병도 구별할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간교하여 병역의 의무는 어떤 식으로도 빠져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삽질과 거짓말뿐인데, 이런 것으로는 그 어떤 전쟁도, 그 어떤 외교도 이길 수 없다.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자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과연 그 탐욕과 어리석음에 빠져 있던 백성들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이런 까닭에 백번 싸워 백번 모두 이기는 것은 최상의 방법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리더이다. 우리에게 그런 리더를 맞을 수 있는 천운이 다시 한 번 올 수 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고, 설령 온다 하더라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때문에 한반도의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며, 그저 앞으로 2년 동안 별일 없이 살기를 기도할 뿐이다.

연평도 포격으로 숨진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세상에서는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는 나라에서 태어나시길 바란다.

특별해지기를 포기하라

특별해지기를 포기하라

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리 짧지도 않았던 나의 생을 돌아보면 대체로 평온했다. 운이 몹시 좋은 편이었다. 그것 밖에는 달리 평온한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육체적으로 아주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것을 고통이라 생각하기보다는 그런 시련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시련도 사라져야 할 때가 되니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의도한 것은 없었다.

대체로 평온한 삶 속에서 나는 순간순간 행복했는데, 그 행복한 이유는 아무것도 집착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포기가 무척 빠른 사람이었다.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속담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번은 찍어 보지만 넘어가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열에 아홉은 한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였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는 한번 찍어 넘어가는 나무가 있었고, 나는 그 나무를 선택해 버렸다. 내 삶의 궤적은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졌다. 학교도, 직장도, 결혼도 모두 그런 식이었다.

사람들이 왜 성공을 하려 하는지, 왜 부와 명예를 쫓는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성공, 부, 명예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면 대체로 편안해진다. 무엇을 갖고자 하는 욕망,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것이 “책”인데, 그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에게 의미가 없어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전히 책을 사고 책을 읽는다.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학자, 릭 핸슨(Rick Hanson)과 리처드 멘디우스(Richard Mendius)가 쓴 책 <붓다 브레인(Budda’s Brain)>은 추천할만한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자아 내려놓기”는 누구나 한번은 읽어보았으면 하는 부분인데, 특히 내 삶의 궤적을 합리화할 수 있는과학적 논리를 제공해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몹시 기쁘고 행복했다.

저자들이 신경과 뇌를 연구하면서 밝힌 사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는 “나” 또는 “자아”는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신경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매일 느끼는 통합적인 자아란, 완전한 환상에 불과하다. 뚜렷하게 일관성 있고 확고한 ‘나’라는 개념은 사실은 발달 과정을 거쳐 여러 하부 및 하부-하부 체계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중추도 없으며 ‘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희미하고 산만한 주관성의 경험을 통해 날조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란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한데, 결국 종교(특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깨달음의 첫걸음은 이런 자아의 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자아가 원래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아를 벗어나기가 한결 쉬울 것 같다.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인데, 그 개념은 욕망과 함께 자라난다.

자아는 소유에서 자라난다. 자아는 주먹 쥔 손과 같다. 손을 펴서 내어 주면, 주먹은 사라지고, 자아도 사라진다.

이 대목은 왜 법정 스님께서 늘 무소유를 주장하셨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자아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 바로 무소유였기 때문이다. 욕망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견고했던 자아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자아가 사라질수록 우리는 평안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몇 가지 충고들은 나를 몹시 기쁘게 했는데, 그것은 때때로 아내가 나에게 “무대책적 낙관주의자”라며 핀잔을 줄 때 써먹을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특별해지기를 포기하라. 중요한 사람이 되고 존경받고 싶다는 갈망을 버려라. 포기는 집착의 반대이므로 행복으로 가는 특별한 급행로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이 될 이유도 없었고, 되고 싶지도 않았던 내 삶이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학교에서의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늦은 일인데도 아직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쓰레기 언론에서도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자 아무 대책도 없이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했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그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정말 사람을 때려서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게 진심인지, 아니 객관적으로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아이들이 맞기 싫어서 말을 듣는 것이 정말 교육이라고 생각하는지, 교사라고 해서 정말 아이들을 때릴 권리가 있는지, 그것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이란 교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매”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널 너무나 사랑하기에 널 죽도록 팬다? 너무나 웃긴 얘기다.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하지 않듯이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체벌 금지가 학교 현장을 몰라서 하는 순진한 얘기라고 몰아부친다. 체벌을 금지하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체벌 금지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람들은 교육 현장에서 떠나야 한다. 체벌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없다는 사람들은 이미 교육자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아버지이며, 어른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이상 증상을 보일 때는 분명 기성세대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거의 대부분 어른들의 책임이다. 부모의 책임이고, 교사의 책임이고,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때려서라도 가르치겠다? “나는 똑바로 걸을 수 없지만, 너는 똑바로 걸어야 돼”라고 울부짖는 엄마 게가 생각난다.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겠다고 하는 발상은 일본제국주의와 군부독재와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하긴 아직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일제잔재와 독재부역 세력들이니 학교에서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렇게나마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오늘같이 청명한 가을날에 듣고 싶은 노래. 인간들이 세상에 거의 유일하게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음악이 아닐까라는 생각.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내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한경혜 작사,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젊음 그리고 사랑

젊음 그리고 사랑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불과 같은 사랑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 사랑도 언젠가는 식어버린다. 달콤한 사랑일수록 아픔과 상처도 그만큼 깊어질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죽음으로 끝난 비극적 사랑이었기에 아름다웠다. 실제로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긴 세월을 같이 살았다면, 그들도 끊임없이 싸우고 화해하고, 그들의 열정적 감정도 세월에 따라 변했을 것이다.

지독하게 격한 감정을 믿지 말라. 그것이 사랑이든, 증오이든 간에 그런 감정은 늘 순간적인 것이다. 평정심이 생겼을 때, 그 감정을 조용히 바라보면 그 감정을 일으키게 한 상대를 보다 냉정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젊음은 이런 따위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이 젊음이다.

삶의 여러 굴곡을 거치고 산전수전을 겪은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우리의 생이 바뀔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때문에 삶은 운명이다. 사랑도 그렇고 이별도 그렇다.

젊었을 때 꽤나 좋아했던 영화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테마. 오늘 문득 이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What is a youth? Impetuous fire.
What is a maid? Ice and desire.
The world wags on.

A rose will bloom, it then will fade.
So does a youth, so does the fairest maid.

Comes a time when one sweet smile,
Has its season for a while.
Then love’s in love with me.

Some they think only to marry.
Others will tease and tarry.
Mine is the very best parry.
Cupid he rules us all.

Caper the caper; sing me the song.
Death will come soon to hush us along.

Sweeter than honey and bitter as gall.
Love is the pasttime that never will pall.

Sweeter than honey and bitter as gall.
Cupid he rules us all.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했던 말,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한나라당 출신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가 됨으로써 민주당은 자유선진당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위성 정당이 되었다. 민주당 대표 손학규가 노무현 대통령 묘소에 가서 무릎을 꿇었지만, 그 모습에서 아무런 진심이나 감동을 엿볼 수 없었다. 죽은 노무현은 말이 없었고, 손학규는 여전히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노무현은 한줌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재벌, 언론, 한나라당, 그리고 검찰 등으로 이루어진 이 땅의 특권 세력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파트 한채 부여 잡고 집값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은 성가시고 귀찮고 불편한 존재였다. 수구, 진보를 막론하고 노무현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고, 그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의 진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는 한줌 밖에 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도 너무 미안해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던 데다가 결벽증까지 있었던 터였다. 그는 쓸쓸히 스스로를 유폐시켜 갔다.

노무현이 죽자 세상은 그들이 원하던 지난 세월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욕하고 증오하던 그가 사라졌는데 정작 그들의 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강을 파헤치고 보를 세워 카지노배를 띄우겠다는 환상적 계획 앞에서도, 국민의 세금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음향대포를 들여와도, 배추 한포기에 만오천원이 넘어 김장을 하기 힘들어도, 경포대라고 노무현을 비아냥대던 손학규가 민주당의 대표가 되었어도 사람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미FTA에 대해 “좌파신자유주의”라고 게거품을 물던 진보들도 한-EU FTA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보도되면서 그가 쓴 <만인보>의 “노무현”이란 시가 회자되고 있다.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내는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고은, “노무현”, <만인보> 중에서>

고은 시인은 이미 13년 전에,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이전에 노무현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그가 정치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특권과 탐욕이 판을 치던 시대에 노무현은 이방인이었고, 그는 세상과 타협을 하거나 공존할 수 없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세상은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그를 후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이기 때문이리라.

노무현은 참으로 쓸쓸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쓸쓸함을 사무치게 사랑했다.

잔인한 본능, 그리고 희망

잔인한 본능, 그리고 희망

지구 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동물인 인간은 생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종족을 공격하거나 죽인다. 같은 종족끼리 전쟁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동물은 인간이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는데,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흡사하다는 침팬지에게서도 이런 경향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제인 구달이 쓴 <희망의 이유>에는 한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를 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나온다.
침팬지 길카가 새끼를 안아 어르고 앉아 있었을 때, 또 다른 침팬지 패션이 나타나서 잠시 동안 노려보다가 털을 세우고 공격했다. 길카는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나 그녀는 절름발이였다. 1966년 유행성 소아마비로 손목 관절 하나가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던 것이다. 절룩거리는데다가 보호할 새끼까지 데리고 있어서 길카에게는 가망이 없었다. 패션은 그 새끼를 잡아채어서 앞이마를 한번 강하게 물어죽이고 나서, 딸과 어린 아들과 함께 소름끼치는 축제를 벌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중에서>
침팬지 패션은 먹을 것이 없어서 길카와 그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은 것이 아니다. 이런 소름끼치는 행위가 인간만큼 빈번한 것은 아니지만, 침팬지들도 증오와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몇 백만년 전에 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형질이 유사함을 말해준다. 며칠 전, 어느 장애여성이 무자비한 구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조사결과 이들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에 붕대까지 감았으며, 50대씩 돌아가며 때리기도 하는 등 무자비하게 김씨를 집단구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이들은 김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고 경찰은 밝혔다. <성폭행범으로 오해받자 장애여성 집단구타로 숨지게 해, 노컷뉴스>
이런 잔인한 사건들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맹자는 인간들이 본래 선하게 타고 났다고 말하면서 측은지심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측은지심과 더불어 극도의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배금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서는 이러한 잔인한 풍경이 일상이 되고 있다. 제인 구달은 올해로 76살이 된 할머니이다. 1년에 300일 이상 지구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희망을 말한다. 그는 몇 되지 않은 희망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아직 인간들이 지구를 더 이상 망치지 않고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여전히 낙관적이고, 유쾌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의 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