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과연 누구 책임인가

헬조선, 과연 누구 책임인가

유명 대학 교수들이 페이스북에서 헬조선에 대한 논쟁을 벌인 모양이다. 한 교수는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빈정대는 청년 세대를 철이 없다고 꾸짖었고, 다른 교수는 청년 세대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 세대의 오만이라고 맞받았다. 하지만, 헬조선 문제를 세대 대결로 치환하는 것은 논점이 벗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헬조선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고, 계급의 문제이고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알아야 이 논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우선 청년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 나라는 헬조선인가? 이 땅의 대다수 청년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나라는 정의롭지 못하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있다. 헌법 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이지만, 사실은 신분제나 계급제 국가라고 봐야 한다. 그래도 이전 세대에서는 어느 정도의 신분 상승이 허용되었으나, 이미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는 지났다. 희망이 없는 사회, 청년이 신음하는 사회, 아이 낳기를 꺼리는 사회는 분명 헬조선에 가깝다.

왜 이렇게 되었나? 해방 이후 첫단추를 잘못 꿰었다. 단죄되어야 할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모든 일이 꼬였다. 그 이후 수십 년간 (소위 산업화 세력이라 불리는) 군부 독재가 들어서면서 친일파와 독재 부역 세력이 명실상부한 지배 세력이 되었다. 이들이 재벌, 언론과 결탁하여 반칙과 특권으로 자신들의 계급을 만들어갔다. 이들은 보수세력이 아니다.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이 나라에서는 당연히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탄압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개, 돼지 취급을 당했다.

청년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나 할아버지 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기성 세대를 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기성 세대는 청년들에게 미안해 해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친일과 독재 부역 세력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들었다. 기성 세대의 잘못은 이런 기회주의 지배 계급을 타파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것이다. 따라서 계급의 틀은 나날이 공공해진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연대나 협력은 개나 줘버려야 한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 인간들만이 지배 계급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다.

그렇다면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인가? 두 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일말의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가치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정의로운 나라에 다가서고 있다. 헬조선을 만든 건 기성 세대지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청년들의 몫이 되었다.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그 희망은 점점 커질 것이다.

지배 계급은 몹시 견고하다. 행정부만을 제외하고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상부구조를 장악하고 있다. 이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는 해피조선은 가능하지 않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리고 그 청년들이 기성 세대가 되었을 때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라. 예전에는 헬조선이었지만, 지금은 해피조선이라고. 청년들의 건투를 빈다.

대통령을 가장 잘할 사람

대통령을 가장 잘할 사람

현재 우리나라 정치인 중 대통령을 가장 잘할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 문재인. 가장 대통령을 잘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았으니 당분간 이 나라의 걱정거리는 많이 줄었다.

오늘 국정운영 100대 과제 발표를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정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발표의 내용과 형식이 최고 수준이고, 지난 2달 동안 이 일을 진행한 사람들의 면면이 훌륭하다. 믿음직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5년간 국정을 경험했다. 경험으로 봐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가슴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우월한 외모까지 겸비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권력의지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노무현의 운명을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원칙을 끝까지 지키며, 리더로서의 무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늘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우리 사회 약자 편에 서서 일을 한다. 품성으로 봐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이 나라의 복이다.

10년 전쯤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발표와 비슷한 형식의 연설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노무현 대통령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던 때였다. 사방이 적이었고, 노무현은 너무나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던 시절이었다. 연설의 달인이었던 노무현조차 버거워했던 연설이었다.

오늘 문재인 정부는 정말 세련되고 근사했다. 그리고 여유로웠다. 10년 전의 당황하던 노무현이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유능한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민주 세력이 집권 경험을 쌓아 가면서 이제는 도덕성뿐만 아니라 능력으로도 기회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있다. 내년 지방 선거, 그 이후 총선을 통해 지방 권력과 의회 권력마저 가져온다면,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발표를 보았다면, “이야, 기분 좋다!”고 했을 것 같다. 그가 많이 보고 싶다.

샤오미 미밴드 효과

샤오미 미밴드 효과

주위에 스마트 밴드나 스마트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런 종류의 기기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귀찮게 그런 걸 차고 다니나 그런 정도의 생각이었다.

6월 말에 샤오미 미밴드2를 샀다. 샤오미 미밴드를 사게 된 이유는 우선 저렴하고,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 측정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샤오미 미밴드가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 매일 몇 걸음을 걸었는지가 기록이 되기 때문에 오늘 10,000보를 꼭 걸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런 동기부여 효과를 “샤오미 미밴드 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때는 피곤하거나 귀찮기 때문에 아침 운동을 거르기도 하는데, 미밴드가 생기고 난 다음에는 귀찮아도 아침 운동을 꼭 하게 된다. 왜? 10,000보 이상을 걸어야 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에.

지난 12일 동안 하루 평균 13,000보, 거리로는 10Km 정도를 걸었다. 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이든 성과를 내려면 우선 현재 상태를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측정하여 데이터로 남겨야 한다. 샤오미 미밴드를 사용하면서 다시 확인한 깨달음이다.

어느 화가의 유언

어느 화가의 유언

“예술은 본능”이며, “예술에서의 이론은 의사의 처방전 같아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환자”라고 일갈한 프랑스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ce de Vlaminck)는 죽기 전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삶은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며, 내가 본 것을 그렸다.

Je n’ai jamais rien demandé, la vie m’a tout donné. J’ai fait ce que j’ai pu, j’ai peint ce que j’ai vu.

삶을 충만하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남긴다.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거나 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 된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반백년이 걸렸다.

천년을 산다는 것

천년을 산다는 것

충북 영동에 가면 천태산이라는 빼어난 산이 있는데, 그 천태산 기슭에 영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영국사 앞마당에는 천년된 은행나무 한 그루(천연기념물 제223호)가 당당히 서 있는데, 그 높이가 30미터가 넘는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 은행나무는 나라의 큰 일이 생기면 소리 내어 운다고 한다.

그 나무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지켜보며 자랐을 것이고, 이 땅의 희로애락을 모두 견디어내며 천년을 살아냈을 것이다. 천년의 슬픔과 천년의 한과 천년의 고단함이 가지가지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그것을 견디고 버티면서 매일매일 새날을 맞이하는 그 모질고 질긴 생명력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영국사에서 풍겨오는 보리수 꽃향기 속에 오늘도 그 나무는 천년을 하루같이 말없이 고독을 견디고 있다.

주산지의 가뭄

주산지의 가뭄

여름은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스며들었다. 정수리 위의 태양이 연일 뜨거운 볕을 내뿜었다. 지난 2주 동안 한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다. 땅이 갈라지고 작물은 메말라 농민들의 속은 타들어갔다. 몇 년 전부터 6월의 장마는 자취를 감췄다. 기상청은 마른장마라고 얘기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장마라 일컫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삼백 년 동안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던 경북 청송의 주산지도 바닥을 드러냈다. 수백 년을 물 속에 잠겨 있었던 왕버들의 무수한 잔뿌리가 하염없이 말라갔다. 신비롭고 고혹스러웠던 주산지의 풍광이 옛모습을 잃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살 수가 없다.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온천지에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볼 요량이다. 그리하면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그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을까. 주말에는 제법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다. 그 비로 대지의 메마름이 조금이나마 걷히길 빌어본다.

소년들은 쉬이 늙고

소년들은 쉬이 늙고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학문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년들은 쉬이 늙었다. 돌아보니 30년이 흘렀다. 30년 전에는 모두들 까까머리 소년들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무게 앞에 힘겨워하는 장년의 아재들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만 진학하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세상은 대체로 비루하였고, 희망 따위는 너무 아득하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하루하루를 잘 버티고 견디어 30년을 살아냈으니, 그 소년들이 어찌 대견하다 하지 않겠는가. 소년들이여, 수고 많았다. 그대들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박수를 보낸다.

이제 소년들은 그들이 비판했던 기성세대가 되었고, 꼰대가 되었다. 남은 삶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꾸역꾸역 건강하게 살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삶의 무게가 저절로 사라지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세상에 태어난 이유

간밤에 내린 비로 나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상쾌하고 촉촉한 6월의 아침, 딸아이가 생일 축하 카드를 보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을 지배하는 궁극의 원리가 사랑임을 깨닫고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닌지… 딸아이가 보내 준 카드가 문득 그것을 일깨운다.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딸아!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인간이 공식적으로 기계를 이길 수 없음이 증명되자,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이미 380년 전에 그의 책 <방법서설(Discourse on the Method)>에서 기계가 사람처럼 이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즉 원숭이나 이성이 없는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기관과 모양을 가진 기계가 있다면, 이 기계가 저 동물과 동일한 본성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신체와 비슷하고, 우리 행동을 가능한 한 흉내낼 수 있는 기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인간일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아주 확실한 두 가지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 기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 생각을 알게 할 때처럼, 말을 사용하거나 다른 기호를 조립하여 사용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계가 말을 할 수 있도록, 나아가 그 기관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적 작용에 따라 어떤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가령 어디를 만지면 무슨 일이 일이냐고 묻는다든가, 혹은 다른 곳을 만지면 아픈 소리를 지른다든가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자기 앞에서 말해지는 모든 의미에 대해 대답할 정도로 말들을 다양하게 정돈할 수 없지만,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그런 것을 할 수 있다. 둘째는, 그 기계가 우리 못지 않게 혹은 종종 더 잘 많은 일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언가 다른 일에 있어서는 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며, 이로부터 그 기계는 인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기관의 배치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성은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구인 반면에, 이 기계가 개별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개별적인 배치가 기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우리 이성이 우리에게 행동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삶의 모든 상황에서 행동하기에 충분한 다양한 배치가 한 기계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I worked especially hard to show that if any such machines had the organs and outward shape of a monkey or of some other animal that doesn’t have reason, we couldn’t tell that they didn’t possess entirely the same nature as these animals; whereas if any such machines bore a resemblance to our bodies and imitated as many of our actions as was practically possible, we would still have two very sure signs that they were nevertheless not real men. (1) The first is that they could never use words or other constructed signs, as we do to declare our thoughts to others. We can easily conceive of a machine so constructed that it utters words, and even utters words that correspond to bodily actions that will cause a change in its organs (touch it in one spot and it asks ‘What do you mean?’, touch it in another and it cries out ‘That hurts!’, and so on); but not that such a machine should produce different sequences of words so as to give an appropriately meaningful answer to whatever is said in its presence—which is something that the dullest of men can do. (2) Secondly, even though such machines might do some things as well as we do them, or perhaps even better, they would be bound to fail in others; and that would show us that they weren’t acting through understanding but only from the disposition of their organs. For whereas reason is a universal instrument that can be used in all kinds of situations, these organs need some particular disposition for each particular action; hence it is practically impossible for a machine to have enough different organs to make it act in all the contingencies of life in the way our reason makes us act.

요즘 기계들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람의 말을 알아 듣는(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사람처럼 행동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지, 그것들이 의미를 이해하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이나 커제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램되었기 때문이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놀이가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인간의 특정 부분을 흉내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과 같은 기계를 만들 수는 없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진정한 의미의 튜링 기계(인공지능)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시민일 뿐입니다

한 사람의 시민일 뿐입니다

I am not a client, a customer, nor a service user. I am not a shirker, a scrounger, a beggar nor a thief. I am not a national insurance number, nor a blip on a screen. I paid my dues, never a penny short, and was proud to do so. I don’t tug the forelock but look my neighbour in the eye. I don’t accept or seek charity. My name is Daniel Blake, I am a man, not a dog. As such I demand my rights. I demand you treat me with respect. I, Daniel Blake, am a citizen, nothing more, nothing less. Thank you. <“I, Daniel Blake”, 2016>
개가 아닌 사람으로, 그것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존중받고 살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시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소박하지만 아직은 원대한 꿈.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니엘 블레이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