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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의 추억

탕수육의 추억

어릴 적 장날이면,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곤 했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이것저것 식재료를 구입하셨고, 그 뒤를 졸졸 따라 다닌 꼬마의 다리는 몹시도 아팠다.

장을 보고 난 후 어머니는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한 그릇 사주곤 하셨는데, 그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짜장면 값이 15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벌써 4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이 이사를 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자식을 대처에서 가르치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중국 음식이라면 짜장면과 짬뽕 정도만 먹었던 시골 아이가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탕수육을 먹어 보았다. 그때의 맛을 역시 잊을 수가 없다.

고소하고 바삭하게 튀겨진 돼지고기가 달착지근하면서 시큼하고 끈적하고 느른한 소스에 버무려져 나왔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고추가루를 푼 간장에 찍어 먹었다. 달콤하고 시큼하고 짭잘한 돼지고기가 입 속에서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맛이라 당황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런 음식도 있구나! 그때부터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늘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었다. 3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결혼하기 전 아내와 만날 때, 우리는 주로 탕수육을 먹었다. 탕수육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회사 근처의 탕수육 잘하는 중국집은 모두 섭렵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2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일요일 점심, 가족들과 함께 중국음식점에 가서 탕수육을 먹었다. 바삭한 고기와 새콤달콤한 소스가 따로 나왔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찍먹 탕수육이었다. 그 탕수육을 먹으면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도 탕수육은 크게 변한 게 없었고, 식구들은 여전히 탕수육을 맛있게 먹었다.

외할머니

외할머니

열평 남짓한 병실에 여덟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 누운 노인들의 절반은 의식이 없었고, 나머지 절반도 거동할 수 없었다. 희미한 전등 아래, 노인들은 모두 초췌하고 힘들어 보였다. 외할머니는 병실 문에서 두번째 침대에 누워 계셨다. 할머니의 얼굴과 몸에 여러 가지 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산소가 맹렬히 주입되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호흡은 힘들었고 맥박은 불규칙했다. 젊은 의사는 할머니가 오늘밤을 넘길 수 없으니 준비를 하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병원에서 무엇을 더 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기계를 동원해서 강제로 숨을 쉴 수 있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할머니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히 얘기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가 눈을 번쩍 뜨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동공은 이미 빛을 잃고 있었다. 가족들이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어렸을 적, 외가는 대도시 시내 한복판 산동네에 있었다. 시외버스를 내려 시장을 지나고, 고불고불 산동네 골목을 통과하면 언덕배기에 외가가 있었다. 그 집에는 깊은 마당이 있었고, 나무들이 울창했다. 산림청에 오래 근무하셨던 외할아버지는 멋진 나무들을 많이 키우셨다. 외가는 낡았지만 서너 채의 건물이 있었고 작은 방들이 많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 방들을 이용하여 하숙을 하셨다. 외가에는 언제나 젊은 하숙생들로 북적였고, 생기가 넘쳤다. 할머니는 그 집에서 7남매를 키우셨다. 할머니는 호탕한 여장부셨고, 음식 솜씨는 거의 인간문화재 급이었다. 잔치를 하면 그 산동네 사람들을 죄다 먹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떡과 한과, 그리고 누룩술의 달인이셨다. 언젠가 한 번은 할머니가 선짓국을 해주셨는데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지만,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할머니는 동네 친구들과 화투놀이를 즐기셨는데, 때로는 밤을 새기도 하셨다. 사람들은 화투놀이가 치매예방에 좋다고 하지만, 지나친 화투놀이는 노인들의 관절에 치명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는 관절에 이상이 왔고,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외가가 있던 그 산동네도 도시 계획에 따라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낡았지만 운치있었던 외가도 절반이 개발 구역에 들어 집가운데로 도로가 나고 말았다. 낡은 집들을 헐어내고, 조그마한 건물을 지었지만 더 이상 예전의 그 집이 아니었다. 자식들은 그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 동네를 떠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두달이 되었다. 지금은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할머니도 안 계신다. 예전의 그 낡고 정겨운 외가도 사라졌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추억, 외가에서의 추억은 오롯이 남았다. 흘러 갔지만, 그 아름답던 시간들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그런 것이고,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이다.
할머니, 하늘 나라에서 평안하세요. 사랑합니다.
옛 노트에서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옛 노트에서]

그리움이 화석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그리움의 화석이 켜켜이 쌓여 지금 내 모습이 된다. 지나간 시간들은 내 몸으로 들어와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