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절망이 엄습할 때가 있다. 거듭된 실패와 시련으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그것을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수천년 전부터 그 절망적 상황은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성으로 그 수천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논리적인 설명을 부여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라고 하늘을 원망하거나 삿대질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어쩔 것인가.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런 절망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은 이번 생에서 꼭 해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절망적 상황은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 상황을 극복하게 되면 사람은 한층 깊어지게 마련이다.
잘 알려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보면 왜 절망이 축복인지 알게 된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지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게 되나니,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덕을 베푸는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적은 이익으로 부자가 되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당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보왕삼매론>
시련과 실패는 사람을 깊어지게 한다. 절망을 이겨내면 더욱 성숙해지기 마련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