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불사조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인제는 충청이 낳은 걸출한 기회주의자다. 지금까지 13번 당적을 옮기면서 6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번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3번의 당적 변경은 아마 기네스북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히 김종필의 뒤를 이을만한 위대한 생존능력을 지녔다.
이인제는 숱한 당적 변경에도 총선에 출마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당선이 되어 인터넷 상에서는 불사조 피닉제(피닉스+이인제)로 통한다. 심지어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도 당선되었다. 그런 이인제가 이번 20대 총선에서 더민주 김종민 후보와의 대결에서 져 1천여표 차이로 아깝게 낙선한다. 그들의 대결은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전과 같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혈투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인제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생존능력을 비하하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은 사실 이인제라는 인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김대중, 노무현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정치가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성공은 이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인제가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위대한 인물이었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김종필과 DJP 연합까지 했지만, 이인제가 출마하여 신한국당의 지지를 갈라 놓지 않았다면, 15대 대선의 승자는 신한국당의 이회창이었다.
당시 신한국당(지금의 새누리당)이 IMF 외환 위기 아니라 그 할애비를 불러왔다고 해도 김대중은 이회창을 이길 수 없었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 탈당, 국민신당 창당, 대선 출마의 일련이 과정이 없었다면 김대중은 이회창을 이길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치와 언론 환경이 척박했다.
16대 대선도 마찬가지다. 이인제가 새천년민주당에 들어와 유력 대선후보가 되지 않았다면 노무현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의 대선 출마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바로 이인제였다. 노무현은 이인제와 같은 기회주의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인제가 정통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노무현은 2007년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결정적인 것은 이인제씨 때문이죠. 이인제씨가 2002년 대선 전에 우리 민주당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였죠. 내가 그때부터 ‘이거 큰일 났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회창씨 쪽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내 상대는 이인제씨였어요.”
“경선불복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우리 당으로 와서 여기서 또 후보하겠다고 하는데…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 닿지 않는 현상, 그리고 그 현상에 영합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과 세력을 보면서 이게 뭐냐, 이게 정치냐, 이대로 가도 되냐고 분노했지요.”
“내가 이인제와 끝까지 맞섰던 것은 그 사람의 정책이나 기능이나 역량이나 이런 것이 나보다 훨씬 더 처진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칙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간 것이나, 경선불복한 것, 그리고 다시 보따리 싸고 당을 나와서 이전해 온 것, 이런 것들이 정치윤리상으로는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노무현은 왜 대통령에 도전했나, 오마이뉴스>
이처럼 대한민국 민주정부 10년은 이인제의 결정적 역할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의 대변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종민 후보에게 져서 낙선했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일지 모른다.
불사조 이인제. 그는 그렇게 정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가 정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아니면 다음 총선에서 70이 넘은 노구를 끌고 또다시 부활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불사조 피닉제니까.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편안히 남은 생을 즐기시라. 이제 그만 쉴 때도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