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혁명적인 것
김규항의 <예수전>을 보다가 깊이 공감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드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김규항, 예수전, p.248>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노무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무현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은 종종 있었지만, 노무현만큼 지배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물은 없었다. 결국 지배세력의 공포와 열등감이 노무현을 제거하려 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해서 그들의 시도를 원천봉쇄했다.
80년 광주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젖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 세대가 흐르고, 이제 노무현이 광주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광주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광주의 정신을 계승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의 길을 걸었지만, 노무현의 가치는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김규항의 정의대로 지배세력을 가장 위협했고, 지배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을 혁명의 가장 걸림돌로 지목하면서, 노무현과 지향이 같은 세력을 바리새인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규항과 같은 좌파들이 참여정부를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보다도 더 증오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이 오히려 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을까? 이 땅의 지배세력은 자칭 좌파라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예쁜 책이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묵상과 천착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