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과 영웅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빌렘이 말했다.
“너의 말은 다만 말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너의 말은 뉘우치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너는 너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라.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라.”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사업에 실패해서 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
“그것은 세속의 마음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너의 마음의 깊은 곳에 또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말하기 힘들어도 그것을 말해라.”
안중근은 눈을 감고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안중근이 말했다.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쓰러뜨리고 나서, 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 p. 272-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