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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월간 《우리詩》, 2008>

분홍 장미

분홍 장미

아내의 생일에 장미꽃 한 다발을 보냈다. 분홍색 장미가 무척 싱그러워 보였다. 젊은 날의 아내를 보는 듯했다. 아내는 평생 본 장미 중에 가장 예쁘다고 했다. 분홍 장미의 꽃말은 “맹세, 단순, 행복한 사랑“이라고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우리의 행복한 사랑이 건강하게 지속되길 빈다.

더 많이 도와줄게

더 많이 도와줄게

좋은 남편들이 아내가 힘들 때 하는 말.

“내가 더 많이 도와줄게.”

남편들의 선의는 알겠는데, 이 말의 속뜻을 알게 되면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을 도와준다는 것은 “그 일이 본래 당신 일이지만 마음씨 착한 내가 당신이 힘들지 않도록 협조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일은 본래 당신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의 집안 일을 돕는 남편은 언제나 착하고 좋은 남자들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대개의 남편들은 집안 일을 돕는다고 얘기하지, 그 집안 일이 자기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내가 전업주부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맞벌이 부부인 경우에도 남편들은 집안 일을 돕는다고 얘기한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이제 곧 설 명절이다. 명절증후군을 앓는 이 땅의 모든 아내와 며느리들을 치유하려면 남편들은 집안 일을 도와줄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바로 자신의 일임을, 자기가 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생활은 바로 남편들의 정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설에는 진실로 철든 남편들이 되시길 그리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결혼 20주년

결혼 20주년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과 결혼한지 오늘로 20년이 되었습니다. 20년 전, 당신은 화사한 봄날에 피어나는 복사꽃 같았지요. 그렇게 예쁘고 재기 발랄했던 당신과 스무 해를 같이 살았네요. 삶이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동안 좋은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좋은 일은 함께 기뻐했고, 힘들고 지칠 때는 당신이 위로가 되어 주었지요. 그 모든 순간에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내가 당신과 함께 20년을 살면서 괜찮은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사랑을 알게 되고 행복을 깨달았으며, 좋은 아빠가 되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 덕분입니다. 우리의 분신인 딸아이를 얻은 것도,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이제 열여덟의 예쁜 고등학생이 된 것도 모두 당신 덕입니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그냥 인연이 아니라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얘기했듯, 우리는 이전 생에서 이미 여러 차례 부부나 남매의 인연을 반복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생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벼락 같은 행운이었고, 당신과 같이 지낸 모든 순간들이 축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죽는 날까지 아니 그 이후의 생에서도 당신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네요. 모든 게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성숙한 영혼이 되고 싶고 조금 더 괜찮은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결혼 20주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당신이 맨날 말로만 때우냐고 구박할 것 같아 칼릴 지브란이 쓴 결혼에 관한 시 한 편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겁니다.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두 사람은 함께 태어나서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죽음의 흰 날개가 두 사람의 날들을 흩뜨려버릴 때에도 두 사람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요, 두 사람은 신의 고요한 기억 속에서도 함께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되 거리를 두십시오. 하늘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춤추게 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되 구속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 사람 영혼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십시오.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 잔에서만 마시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빵을 나누되 한쪽 빵만을 먹지 마십시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되 각각 혼자이게 하십시오. 마치 거문고의 줄들이 같은 노래로 함께 울릴지라도 각각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 마음을 묶어 놓지는 마십시오. 저 위대한 생명의 손길만이 그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함께 서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마십시오.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 결혼에 대하여>
아내의 낮잠

아내의 낮잠

점심을 먹고 감기 기운이 있다며 아내는 자리에 누웠다. 세 시간 가까이 긴 낮잠을 잔 아내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피곤하여 잠이 쏟아지는데, 아내는 심심하다며 계속 놀아달라고 보챘다.

“제발, 불 좀 꺼 주세요. ㅠㅠ”

“안 돼. 심심해. 나랑 놀아 줘.”

이렇게 10여분 간 실랑이를 하다가 불을 켠 채 잠이 들었다. 자다가 문득 깨어 보니, 형광등이 훤하게 켜져 있고 아내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불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낮잠은 오래 자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내가 몹시 귀여웠다.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통령과 장보기

대통령과 장보기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던 어느 야구장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기 전 시타를 했는데, 그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가 입던 로브를 입고 있었다. 전혀 염색을 하지 않은 흰머리가 바람에 날렸고, 그의 상징이 되어 버린 동그란 안경이 햇빛에 번득였다. 그는 투수가 던진 공을 가볍게 받아 쳤다. 그리고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나와 아내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바쁜데 어떻게 왔냐고 물었고, 나는 쭈뼛거리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고 수줍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는 키가 2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의 품이 몹시 푸근했다. 그는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명왕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야구장을 나와 조그마한 가게에 들렀다. 김정숙 여사가 채소 한단과 버섯 한봉지를 들었고, 아내는 과자를 집어들었다. 내가 서둘러 계산을 하려 하자, 그는 김영란 법에 저촉될 수도 있다며 결벽증을 드러냈다. 나는 “이건 만원도 안 됩니다.”라고 큰소리 치면서 채소와 버섯 값을 계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알람시계가 울렸다. 꿈이었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여혐은 귀태다

여혐은 귀태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태어나지 말아야 할 생명은 없다. 따라서 귀태(鬼胎)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고 저마다의 동등한 존엄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스스로 귀태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여혐)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맞아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욕을 먹어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무시당해야 하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예수도 어머니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고, 고귀한 사랑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성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여성은 인류의 기원이고 남성은 전쟁의 기원이라고.

여혐주의자들이 혐오하는 여성은 바로 그들의 어머니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자기를 낳아준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혐오하는 것이고, 스스로를 태어나지 말아야할 귀태로 전락시킨다.

여혐이 사회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된 이유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열등감 때문이다. 신체적 완력을 제외하고 도대체 남자가 여자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남자들이 심각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남자들의 찌질함이 집단적으로 분출하여 여성을 타자화하고 여혐을 부추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만큼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더군다나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짓밟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스스로를 귀태로 만드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혐오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 아니 이 우주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5월의 장미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러운 여성들을 어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이 세상을 더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모든 아내들과 모든 며느리들과 모든 딸들에게 사랑과 존경과 위로를 바친다. 그대들이 있기에 이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되었다고.

엄마와 컴퓨터

엄마와 컴퓨터

타닥타닥 타닥타닥
늦은 밤
고요함을 깨고
낮게 울려퍼지는
컴퓨터 소리

엄마는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신다

낮에 보니
자판이 다 닳아 있는
엄마의 컴퓨터
마음이 쓰라린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반짝
나의 눈은 말똥말똥
엄마 손은 타닥타닥

밤 사이에 훌쩍 자라
내일 아침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시는 딸아이가 밤늦게 일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쓴 것이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아내의 고단한 노동과 그것을 보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딸아이의 예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나무의 시

나무의 시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류시화, 나무의 시>

이 시는 류시화가 아들 미륵이에게 주는 시였는데, 아내는 이 시를 읽으며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내는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생애가 흔들릴 때, 내가 외로울 때,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내 옆에)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아내다. 항상 고맙고 사랑하는 나의 나무가 아내다. 나도 그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행복한 사내

행복한 사내

생일을 맞아, 아내와 딸한테 이런 축하를 받는 사내는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세상을 아니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사랑임을 믿는다. 아내의 생일카드 딸의 생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