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이 몇몇 인터뷰에서 드러낸 역사 인식과 사회 의식은 천박한 것이었다. 그토록 얇은 인식을 그토록 두텁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위악과 용기가 흥미로웠고, 그 두터움 속에 언듯언듯 비치는 그의 여림이 좋았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그의 독특한 무의식적 확신에는 그냥 외면해 버리기는 쉽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안팎을 일관되게 살지 못하는 회색지대 사람들의 죄의식일 수도 있고, 열등감일 수도 있는데, 나도 그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므로 (생각은 다르지만, 삶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끄러우면서도 웃기는 일이다.
문장으로 보면 김훈은 황석영, 조정래와 더불어 우리 시대 최고라 할 만하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 날카롭지만, 그 문장들이 섞이면 때로는 맞서면서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멀미가 날 정도로 현란하게 휘돌기도 하며, 때로는 너무 건조하여 바스러지기도 한다. 또한 문장과 문장들이 뱀같이 서로의 꼬리를 물어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특히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역사 소설에서 그의 섬뜻한 문장은 더욱 빛이 난다.
그가 기자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된 것이 우리 문학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의 소설은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문장을 지닌 소설가의 역사 인식이 지극히 얇은 것은 신이 너무도 공평하거나 아니면 신이 인간을 질투한다는 사실의 반증일 것이다.
그가 한겨레신문 기자 때 쓴 “밥에 대한 단상”은 내가 신문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칼럼이었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관찰자인 기자가 써낼 수 있는 모든 요소가 짧은 글 속에 다 들어가 있다.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칼럼이다. 이 칼럼에서 묘사된 장면은 후에 <배웅>이라는 단편 소설의 한 장면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소설보다 이 칼럼이 훨씬 낫다.
그가 보여준 문장들은 계속되어야 한다. 감당하지도 못하는 말을 줄이고,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문장들을 보여 달라. 그의 인식에는 동의하지도 않고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의 문장은 계속 보고 싶다. 그의 건필을 기원한다.
<덧글> 김훈의 한겨레 쾌도난담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나라는요, 언론이 탄압을 받아서 문제가 생기는 건 절대 아니고, 그 반대야. 너무 붙어먹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언론의 자유? 말도 안 돼. 내가 엠네스티 언론인위원회 위원장이거든. 그 발족식에 가서 내가 물었어. 언론인위원회가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 그러니까 기자들이 보도에 관해 박해받을 때 연대해서 정권과 싸우는 게 목적 중 하나라는 거야. 너희들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어. 누가 박해를 받아. 그때 밀가루 파동 나서 박해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고. (웃음) 문제는 붙어먹어 생긴 거야.
기자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동의한다. 현 시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