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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

사람을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선택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물론 아주 사소한 선택들도 있고 정말 중요한 선택들도 있지만, 그러한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우리의 삶을 완성한다.

이러한 선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새로운 직원을 뽑을 때, 많은 지원자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배우자로서 지금 이 사람은 괜찮은가? 우리 모임의 회장은 누가 되는 것이 좋을까? 대통령 선거가 코 앞인데,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사람을 선택해야 할까. 특히 어떤 조직이나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선택할 때 적용할 만한 기준은 없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선택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 첫째, 이 사람의 삶의 궤적이 어떠한지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 주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사람의 주요 선택들을 살펴 보는 것이다. 특히, 절박한 상황에서의 선택들은 대체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제시대에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혈서를 쓰고 입학하였다면,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로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정권을 잡기 위해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민주주의자로 보지 않는다. 또,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파괴하고 국민들을 탄압했다면,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를 독재자라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 대해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런 독재자의 공과 과를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친일과 군사독재에 부역했거나 또는 그런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기준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누구나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특히 공허한 얘기들을 하지 않는다. 매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얘기들만 하며, 증명될 수 없는 언술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기꾼이거나 기회주의자일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어떤 대통령 후보가 매일매일 정치혁신을 주장하고, 새로운 정치를 해야한다고 말한다고 하자. 물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럼 당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정치가 무엇이요?”, 또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요?” 라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국민이 판단할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후보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정치혁신에 기여한 바가 없는 사람이 말만 이렇게 하고 돌아다닌다면 그는 가짜다. 사람은 말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이(利)에 민첩한지 아니면 의(義)에 민첩한지를 살피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말을 남겼다.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조직이든 자기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의 장이 되었을 때, 그 조직이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대통령이 퇴임 후 살 집을 짓기 위해 아들 명의로 땅을 샀다고 하자. 그리고 아들 명의의 땅을 싸게 사기 위해 경호처 지분을 비싸게 사려 했다면 아무도 이런 대통령을 정상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조그마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과 자신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피의자로 만들고 범법자로 만드는 사람을 정상적인 대통령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은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이런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하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아니 참 쉽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콩이야 팥이야 얘기를 해 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준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오류를 저지른다. 자기를 객관화시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고,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4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면 이 글에서 얘기한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선택해 보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후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 선택이란 일단 최악의 후보를 피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학교에서의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늦은 일인데도 아직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쓰레기 언론에서도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자 아무 대책도 없이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했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그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정말 사람을 때려서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게 진심인지, 아니 객관적으로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아이들이 맞기 싫어서 말을 듣는 것이 정말 교육이라고 생각하는지, 교사라고 해서 정말 아이들을 때릴 권리가 있는지, 그것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이란 교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매”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널 너무나 사랑하기에 널 죽도록 팬다? 너무나 웃긴 얘기다.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하지 않듯이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체벌 금지가 학교 현장을 몰라서 하는 순진한 얘기라고 몰아부친다. 체벌을 금지하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체벌 금지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람들은 교육 현장에서 떠나야 한다. 체벌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없다는 사람들은 이미 교육자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아버지이며, 어른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이상 증상을 보일 때는 분명 기성세대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거의 대부분 어른들의 책임이다. 부모의 책임이고, 교사의 책임이고,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때려서라도 가르치겠다? “나는 똑바로 걸을 수 없지만, 너는 똑바로 걸어야 돼”라고 울부짖는 엄마 게가 생각난다.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겠다고 하는 발상은 일본제국주의와 군부독재와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하긴 아직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일제잔재와 독재부역 세력들이니 학교에서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렇게나마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당연한 일

당연한 일

세상엔 당연히 일어날 일 외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땅한 이유없이 헤어지는 연인이 어디 있으며
까닭도 없는 싸움이 왜 일어나겠는가
당연하게 주저앉아 버릴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폭락해야 할 주가와 폭등해야 할 물가의
오르내림이 또한 당연하고
유유상종으로 헤쳐 모여를 거듭하는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너무도 당연하니
세상 모든 게 당연지사이다

출세의 길은 그러니까 당연히 일어날
일에 대해 남들보다 앞서 준비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별 것 아니다
어제 본 재방송 드라마를 꾹 참고
하루 세 번씩만 더 보는 일
진부함을,
진부함의 지겨움을,
진부함의 고통을 견디는 것
그것이 출세의 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엔 당연히 일어날 일 외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의외의 일이란,
우매한 인간들이 자신도 예상못할 일들을
벌려놓아 빚어지는 넌센스에 다름아니다
제가 벌려놓은 일들로 전전긍긍 불편한 생을
사는 동물이 인간말고 또 있으랴
생활이 편리해지면 인생이 불편해지듯
살아 온 만큼 불행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해종, 당연한 일>

나이를 먹다 보면, 사람들은 삶을 바라보는 몇 가지 기준들을 만드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인과율에 관한 고정관념을 갖기 시작했다.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처럼 보이는 어떠한 사건도 수많은 필연들이 만들어 낸 결과다. 즉, 우연은 필연이란 요소들의 변증법적인 결합일 뿐이다.”

시청 앞에서 정말 우연히 20년 전의 초등학교 짝을 만난다든가, 우연히 산 복권이 당첨되어 횡재를 한다든가, 버스에서 우연히 같이 앉은 여자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든가, 이런 정말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거기에는 낱낱의 필연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수억 마리의 정충 중의 하나가 선택되어 ‘나’라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 성스런 시작은 결코 확률이나 통계의 무책임한 해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런 상상은,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쉽게 저버릴 수 없는 관계라는 것, 내가 지금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라는 생각까지 어렵지 않게 다다르게 된다.

The Road Not Taken

The Road Not Taken

프로스트 (Robert Frost)의 절창 The Road Not Taken 은 이렇게 끝난다.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숲 속의 두 갈래 길 중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는데,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중 몇몇 선택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그때는 지금 알았던 것을 알지 못했다.

루쉰(魯迅)의 소설 <고향> 중에 희망을 길에 빗대어 한 말이 나온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이란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프로스트의 길과 뤼신의 길을 비교하자면, 전자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을 표현한 반면, 후자는 역사 속의 민중의 힘을 나타낸 느낌이다. 우리에게 길은 선택이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 어찌할 것인가. 그때는 길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