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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민주주의

탄핵의 추억 혹은 완성

탄핵의 추억 혹은 완성

박근혜 탄핵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다. 국민들은 촛불을 무기로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촛불 혁명은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성공적인 민중혁명이다. 이러한 집단 경험을 통해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급격히 성장했다. 국민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공화국의 주인임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세 번의 큰 선거가 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율 77%로 행정부 권력이 교체되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투표율 60%로 대구경북을 제외한 지방정부 권력이 교체되었다. 2020년 총선에서 투표율 66%로 의회 권력이 바뀌었다. 지난 세 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투표율이 이전보다 뚜렷이 높아진 것이다. 국민들은 투표를 하면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이것은 국민을 개, 돼지로 취급하는 이 나라 지배세력들에게는 치명적인 소식이었다.

21대 총선 결과, 민주당은 180석의 의석을 얻었다. 개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숫자다. 의회 권력이 바뀌었다고 해서 탄핵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 땅의 지배세력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견고하다. 언론과 검찰이 개혁되어야 하고 사법부를 쇄신해야 한다. 재벌개혁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런 개혁을 통해 탄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만이 민주주의를 성숙시킬 수 있다. 해방 후 75년 만에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일하는 국회를 얻었다. 노무현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이, 바로 그 노무현의 시대가 문재인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다. 노무현의 시대에 노무현이 없다는 사실만이 가슴 아플 뿐이다.

리더십의 완성, 노무현의 경우

리더십의 완성, 노무현의 경우

정치인 노무현은 운명 또는 기적 같은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무기는 상식과 원칙뿐이었다. 그 무기로 그는 이 땅의 지배계급이 수백년 동안 쌓아온 견고한 권력과 싸웠고, 결국 그는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이 나라 정치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정치인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정치적 성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노무현도 자신의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물을 가르고 달린 것 같다.”
그렇다면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성공은 미완성이다. 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John Maxwell)에 따르면, 리더들이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시킬 것인가, 즉 유산의 법칙(Law of Legacy)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 리더의 가치를 결정한다. 아무리 훌륭한 리더라 하더라도 그 리더의 유산이 다음 사람에게 승계되지 못한다면 그 리더는 성공했다고 얘기할 수 없다. 노무현은 훌륭한 대통령이었고, 민주주의를 확장시켰으며, 권위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이것이 참여정부의 가장 뼈아픈 실책이다. 오바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고 훌륭한 리더였지만 그도 역시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다. 그가 이룩했던 많은 성과들이 트럼프에 의해 하루 아침에 망가지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딜레마‘라고 부를 수 있는 일종의 역설이다. 민주주의를 충분히 확장하고 보장했던 훌륭한 정치인이 지도자가 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명박, 박근혜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망쳐 놓은 이후에야 왜 노무현이 훌륭한 대통령이고 훌륭한 리더였는지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더십의 완성은 리더의 유산을 가장 잘 계승 보전할 수 있는 후계자를 준비하는 데에 있다. 노무현의 성공과 노무현의 가치 실현은 아직 미완성이다. 노무현의 성공이 문재인 대통령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그것만이 ‘망해버린 지난 10년’을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그 이름만으로 가슴이 뛴다.
사이다를 믿지 마라

사이다를 믿지 마라

무더운 여름날 마시는 사이다 한 잔은 시원하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사이다를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난다. 사이다 속의 설탕으로 몸 속의 당분이 증가하고 삼투압이 높아져 더 심한 갈증을 느낀다.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는 비만과 각종 성인병을 일으킨다.

가슴 후련한 말을 자주 하는 정치인을 사이다라고 한다. 사이다 발언은 시원하다. 시원한 말들은 청량하지만 거칠고 가볍다. 가벼운 말들은 쉽게 흩어지고 쉽게 바뀐다. 그것은 리더의 말이 아니고, 선동가의 말이다. 리더의 말은 진중하다. 리더는 말에 책임져야 하고, 그 말은 행위로써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리더의 말은 무겁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모든 국가나 조직이나 단체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정당도 예외가 아니다.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다. 정당의 대표나 대선후보는 당원들이 정해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눈 앞의 유불리 때문에 이 원칙을 훼손한다면 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정치인들의 사이다 발언에 현혹되지 말라.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 정치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면 그의 밑천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선택할 때는 사이다를 믿지 마라. 사이다는 사이비일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의 역설

민주주의의 역설

물과 공기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평소 사람들은 물과 공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로 인해 공기의 질이 나빠지고, 4대강에 녹조가 창궐하여 물이 오염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번영하고 인권이 보장되었던 시기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였다. 대통령 욕하는 것이 국민스포츠였던 때였다. 모든 것이 노무현 탓이었던 때였다. 시정잡배와 동네 개들도 대통령을 보고 짖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은 낮았고, 국민이 대통령인 시대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것이 왜 소중한지는 깨닫지 못했다.

이명박이 오고 노무현은 죽었다. 그때서야 몇몇 사람들이 노무현을 다시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알지 못했다. 이명박 치하 5년을 견디고도 사람들은 문재인 대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의 헌법 유린과 국정 농단이 터지기 전에는 사실 누가 이 땅의 주인인지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촛불집회를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렇게 평화로운 집회를 할 수 있을까? 그 광장의 모인 사람들의 힘으로 박근혜가 국회에서 탄핵되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저력과 잠재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국민들 중 과반수가 불과 4년 전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민주주의가 보장될 때는 무관심하거나 소중함을 모르다가 그것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이 최순실이나 박근혜가 아니고 국민들이라고.

민주주의를 보장했던 노무현은 죽임을 당했고, 민주주의를 무시했던 박근혜는 국민들을 일깨웠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국민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무현보다 박근혜의 무개념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투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그런 의미없는 권리가 아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박근혜의 유일한 미덕은 이 나라 국민들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016년 겨울의 촛불집회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은 추운 겨울날이다.

박근혜의 선물

박근혜의 선물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 그리고 이 땅의 지배계급인 친일반민족 독재부역 세력들이 이 나라를 시궁창에 쳐박았다. 모든 소설과 영화를 뛰어넘는 그들의 엽기 행각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이게 나라냐?”, “어떻게 박근혜가 이 지경이 됐단 말이냐?” 사람들은 분노했고,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모든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박근혜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박근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고만 했으면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는 이 시대에 51.6%의 사람들은 묻지마 투표를 감행했다. 박근혜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이 되었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헌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락했다. 죄없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죽어갔으며, 정의로운 사람들이 잘려나갔다. 희망은 사라졌다.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매일 늘어났으며, 아이들은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지배계급은 최선을 다해 부패했고 타락했다.

이 정도의 부패와 이 정도의 타락이라면 이 나라는 당연히 망해야 한다. 아니 망하려면 더 철저히 망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폐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유일한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가 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준 건 절망과 자괴감 그 자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도 몇 가지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고, 역량만 있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그것을 박근혜의 선물이라 말할 수 있을까?

1.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 경험과 지성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100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한다. 그 시위는 평화적이고 감동적이며 축제로 승화된다. 그런 비폭력 평화의 축제 같은 시위로 박근혜를 퇴진시킨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의 집단 경험이 적어도 한 세대, 30년은 간다. 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이제 거의 소진되었는데, 박근혜가 살신성인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다니, 이런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30년 전은 야만의 시대였다. 군인과 경찰이 인권을 유린했으며, 그에 맞선 집회와 시위도 폭력을 동반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과 그때가 다른 건 딱 그만큼이다. 박근혜가 만들어준 이번 기회를 성공적으로 이용한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 헌법 제1조의 중요성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이 나라는 왕조나 봉건제 국가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다. 박근혜가 누렸던 권력은 국민들이 그에게 위임한 것이다. 박근혜는 그 권력을 사유화하여 최태민 최순실 일가를 위해 휘둘렀다. 박근혜와 그 일당들을 단죄하면서 이 땅의 주인은 한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이 아니라 국민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할 것이다.

3. 박정희 신화의 몰락

박근혜의 부패와 타락과 무개념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신화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였고,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처참한 수준의 사람이었다. 박정희의 공과 과를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그런 사람들 역시 대개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독일의 히틀러도 공과 과를 땨져야 할 것이다. 박근혜가 누구를 닮아서, 어떻게 컸길래 저 지경이 되었을까? 그것은 박근혜가 박정희 딸이었기에 가능한 얘기다. 박정희를 반인반신으로 섬기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4. 지역감정의 완화

빌어벅을 지역감정도 역시 걸출한 독재자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박근혜 콘크리트 지지의 핵심이었던 대구경북에서 박근혜가 몰락한다면 그의 아버지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지역감정도 어느 정도 완화될 것이다. 이미 부산경남에서는 민주당이 약진했고, 안철수와 박지원의 국민의당이 호남을 장악했으니, 민주당이 전국정당으로 부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5. 지배계급의 균열

친일과 군부독재 세력이었던 이 땅은 지배계급은 거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재벌, 새누리당, 언론, 사법부, 고위 관료, 군부 등 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여전히 견고하게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그들의 견고한 권력에 조그만 구멍이라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들은 이번에도 적당히 꼬리를 자르고 적당히 변신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박근혜는 그들의 얼굴마담이었고, 유통기한이 다 된다면 철저히 버려질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박근혜의 타락과 부패가 그들의 권력에 균열을 내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민주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민주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도널드 핀켈(Donald L. Finkel)  교수가 쓴 <침묵으로 가르치기>를 읽다가 ‘민주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을 가르치든지 가르치는 사람(교사)이 민주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탐구 활동이란 것이 본래 민주적이다. 탐구할 때는 진실을 찾기 위해 권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2.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교사는 민주사회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낼 민주시민을 길러낼 책임을 느낀다.
  3. 교사의 임무는 학생의 성격 개발에 힘쓰는 것이다. 학생의 독립심, 자신감, 자율성, 판단력, 책임감, 집단의 일원으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성격 특질들이 바로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기본 덕성이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나라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가해자들이 여전히 강자이거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독일이지만, 그것은 금기이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가해자였듯,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가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들도 흑인들에 대해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갚아야할 빚이 적지 않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기본 권리라 하더라도,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방의 언론들은 이슬람교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현대 역사를 살펴 보면,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가해자들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알카이다의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먼저 주장하기 전에, 그 표현으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기 검열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이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 피해자들과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도 된다. 그들의 표현들이 해학이 넘치고 정곡을 찌를 때, 그것은 조롱도 모욕도 아닌 풍자가 된다. 따라서 풍자는 피해자들과 약자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

데이비드 호킨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표현의 자유는 생각의 자유와 관점 표현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지, 감정과 유치한 행동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현대인의 의식 지도, 판미동, p. 157>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따르면,

정부는 빈자들로부터 부자들을, 또는 가지지 않은 자들로부터 가진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Civil government, so far as it is instituted for the security of property, is in reality instituted for the defense of the rich against the poor, or of those who have some property against those who have none at all.

<아담 스미스, 국부론>

2014년 대한민국 박근혜 정부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이 언술에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가진 자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부족한 세수는 서민들에게서 거둔다. 이것이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다.

서민들은 부자를 보호하는 정부를 지지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완성된다. 이러한 정부를 지지하고 선출하는 서민들을 노예라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사실상 노예제가 내재된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가장 슬픈 코미디는 이들 노예들이 스스로 노예인지도 모르고 정부를 앞장서서 옹호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어버이연합과 일베충 등이 있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정부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같다고 보면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아담 스미스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최선의 선택

최선의 선택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로선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그 초석을 만들었다고 볼 때 바른 판단을 내리셨다고 본다.”

박근혜 말처럼 그의 아버지 박정희는 늘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일제시대에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썼고, 결국 원하던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광복군으로 기어들어갔고, 좌익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남로당 군총책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군 장성이 되어 호시탐탐 쿠데타의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마침내 4·19 혁명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총칼로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박정희는 최선을 다한 독재자였고, 최선을 다해 어린 여자들을 희롱하였으며, 최선을 다해 부하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등졌다. 박정희의 최선의 선택은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최악의 불행이었고, 공포였다.

박정희는 독재자이기 이전에 기회주의자였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정국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권력을 향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했다. 물론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만, 그 능력은 자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마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가장 근간이 되는 헌법 1조이다. 박정희는 헌법 1조를 어긴 범죄자일 뿐이다.

그런 박정희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자들은 민주공화국을 부정하는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고, 민주공화국에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그것은 마치 독일에서 아직도 히틀러를 추종하는 네오나치 세력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민주공화국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근본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은 용인될 수 없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는 5·16 쿠데타가 초석이 된 것이 아니고,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이 초석이 된 것이다. 5·16 쿠데타와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반동일 뿐 초석이 될 수 없다.

5·16 쿠데타를 최선의 선택, 바른 판단, 구국의 혁명이라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민주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의 대통령 결격사유는 그가 독재자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선의 선택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

안철수는 진영(당)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했고, 유시민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당도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정치에 있어서 사람보다도 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있어서 당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정당을 지지하기 전에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 인물이나 정당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신중히 살펴보는 일이다. 그 역사의 궤적이 바로 그 인물이 또는 그 정당이 어떤 좌표를 가지고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의 민주공화당(공화당)이 나온다. 공화당이 창당될 때 이승만의 자유당 잔재 세력을 흡수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자유당과도 무관하지 않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으로 흡수되고, 민정당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삼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탈바꿈한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이 되고, 신한국당이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한나라당이 되며, 바로 이 한나라당이 이름을 바꿔 새누리당이 된다.

지금 새누리당의 대표가 박정희 딸인 박근혜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독재자 아버지가 원조인 당을 수십년이 지난 후에 딸이 물려받은 것은 것이다. 친일과 독재와 군사쿠데타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정당이 바로 새누리당인 것이다.

총선이나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찍는다는 것은 친일과 독재에 부역하는 것이고, 군사쿠데타를 용인하는 것이며, 민간인 사찰과 같은 중대 범죄에 암묵적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네오나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새누리당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본질은 보수도 아니고, 극우도 아니다. 그 본질은 자기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목적만 달성할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인데, 그것들이 도를 지나쳐 이미 범죄의 수준을 넘어섰다.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범죄자들과 한패가 된다는 것이고, 본인이 기회주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과 한패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찍어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대통령으로 만들라. 그들을 처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새누리당은 어떤 짓을 해도 유권자 30%의 고정표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그렇게 후안무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름을 놔둔다고 새살이 되지 않는다. 고름은 도려내야 한다. 새누리당은 민주주의의 고름과 같은 존재다. 투표율 70%면 도려낼 수 있다.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은 단지 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고, 서민들의 삶을 짓밟는 것이며, 우리 아들 딸들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