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어가는 고향
어릴 적, 추석에 고향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향가는 사람들로 꽉 들어찬 버스는 차리리 꽁치통조림이었다. 비포장길을 먼지 풀풀 날리며 굽이굽이 달렸던 통조림 버스 속에서 고향은 여전히 아득했다. 서너 시간의 고생 끝에 드디어 당도한 고향은 생기와 위안을 주었다. 시골이라도 북적거렸고, 명절 냄새가 가득했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변했다. 고향을 지키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팔순이 넘거나 아니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많은 것이 편리해졌지만, 고향은 점점 소멸해가고 있었다. 뜨거운 가을 볕에 팔순을 넘긴 농부 몇이 밭에 엎드려 힘겨운 노동을 견디고 있을 뿐, 그 예전의 북적거림과 생기는 모두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고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노인들은 해가 다르게 야위어가고 기력을 잃었다. 머리 맡에 한 바구니의 약봉지만이 그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오래지 않아 떠날 것이다. 고향에는 빈집들만 덩그러니 남을 것이고, 논밭에는 이름모를 풀들이 무성할 것이다.
명절에 찾은 고향은 점점 사위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곧 사라져 버릴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사라질 것이고, 사라지는 것은 그리움의 여운을 길게 남길 것이다. 고향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아련함을 추억하며 살 것이다.
설 연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설 연휴의 끝자락이다. 이번 설은 주말과 이어져 긴 연휴가 되었다. 연휴가 길면 느긋하게 쉴 수 있어 좋은 일이지만, 우리나라 기혼 여성들은 그만큼 더 힘들기도 할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보통 고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차례 음식 장만하랴, 손님 치르랴,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밥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해야 하는 대부분 한국 여성들의 명절은 참으로 고되다. 오죽하면 명절 증후군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요즘 젊은 부부들 중에는 남편들이 제법 집안 살림을 돕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돕는다는 차원이다. 집안의 가사노동이 자기 일이 아니고 아내의 일이지만,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와준다고 얘기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보다는 나아졌지만, 가사노동을 둘러싼 우리나라 남자들의 사고방식은 좀 더 진화해야 한다. 더군다나 아내와 맞벌이를 한다면 집안 일은 공평히 분담해야 한다. 그런 마음을 먹어도 여자들의 노동 강도를 넘어서기 힘들다.
최근 서울시에서 발표한 맞벌이 여성들의 가사노동 강도를 보면 아직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집안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남성 대비 여성의 임금을 비교해 보면, 06년 상반기 남성의 월평균임금은 3,127,000원, 여성은 1,888,362원으로 여성은 남성 임금의 64.1%를 받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임금격차의 벽은 5년 전인 02년과 별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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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성의 가정관리와 가족보살피기 등의 가사노동시간은 4시간 47분(04년 기준)으로 5년 전보다 8분 줄었고, 남성은 2시간 11분으로 5년 전보다 5분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의 비해 2배나 더 높다.
[서울시 ‘직장 여성, 돈 벌면서도 가사부담 여전’, 서울시청]
이것이 서울시의 평균이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전국 평균으로 하면 여성들의 노동 강도는 휠씬 더 증가할 것이다. 2006년 말의 경우를 보면,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남편보다 평균 5배 이상 더 집안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만약 우리나라 여성들이 집단 파업이라도 하면 어찌될 것인가. 제대로 차례를 지낼 수 있는 집이 몇 집이나 될까? 이번 설에도 나는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함포고복했다. 설겆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극구 만류하신다. (이 지점이 아내와 어머니의 세대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아내는 나의 가사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알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집안 일 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과 그의 인수위원회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하자 잘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시기상조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받는 차별이 아직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내와 나의 딸이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여성가족부는 존치되어야 한다.
설 연휴를 고단하게 보낸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다음 명절이 이번보다는 좀 더 나은, 좀 더 편하고 즐거운 명절이 되길 바란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나라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