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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혁명적인 것

가장 혁명적인 것

김규항의 <예수전>을 보다가 깊이 공감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드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김규항, 예수전, p.248>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노무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무현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은 종종 있었지만, 노무현만큼 지배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물은 없었다. 결국 지배세력의 공포와 열등감이 노무현을 제거하려 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해서 그들의 시도를 원천봉쇄했다.

80년 광주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젖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 세대가 흐르고, 이제 노무현이 광주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광주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광주의 정신을 계승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의 길을 걸었지만, 노무현의 가치는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김규항의 정의대로 지배세력을 가장 위협했고, 지배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을 혁명의 가장 걸림돌로 지목하면서, 노무현과 지향이 같은 세력을 바리새인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규항과 같은 좌파들이 참여정부를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보다도 더 증오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이 오히려 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을까? 이 땅의 지배세력은 자칭 좌파라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예쁜 책이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묵상과 천착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죄없는 자만이 이명박에게 돌을 던져라?

죄없는 자만이 이명박에게 돌을 던져라?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서 이 여인을 돌로 쳐죽여야 되느냐고 묻는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7>

한겨레에서 자칭 B급좌파인 김규항이 쓴  “상식의 이름으로”란 칼럼을 읽었다. 김규항의 글을 좋게 봐주면, 이명박이 물러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명박이 물러난다고 해서 노동자, 농민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규항 같은 B급 좌파들이 걱정하는 것은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소위 “상식”이나 “개혁”을 주장하는 자유, 보수주의자들이 독식하는 것이며, 그들 자유, 보수주의자들은 이명박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부류라는 얘기다. B급 좌파들의 주적은 이명박이 아니라 김대중과 노무현이란 얘기다.

이명박이 물러나면 그들의 상식은 회복이 되는가? 알다시피 오늘 비정규 노동자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다. 더도 덜도 말고 땀 흘려 일한 만큼의 열매를 얻는 일이 상식의 회복일 농민들도, 신자유주의로 녹아나는 다른 많은 인민들도 마찬가지다.

보편적인 상식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의 처지에 따라 계급에 따라 상식은 다르다. 심지어 이명박씨의 몰상식 역시 적어도 그 자신에겐 엄연한 상식이다. 세상은 상식과 몰상식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상식으로 나뉘며, 어떤 세상인가는 결국 어떤 상식이 세상을 지배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 유행하는 ‘상식의 회복’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해서 이명박씨가 물러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들, 생존보다는 정신적 고통과 미감이 문제인 사람들의 상식의 회복인 셈이다.

<상식의 이름으로, 김규항>

우리나라의 노동문제가 1997년 김대중 집권으로 생긴 것인가? 김대중 이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절에) 정말 우리나라 노동자, 농민이 행복하게 살았을까? 김대중과 노무현은 아무 문제 없는 정부를 이양받았으나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드려서 지금 이명박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있는가? 1997년의 외환위기는 김대중 정부가 불러왔는가? 그 당시 김대중 말고 권영길이 집권했으면,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정말 보편적인 상식은 존재하지 않는가? 김규항이 보았을 때, 이명박은 상식적인 사람인가? 김대중, 노무현이 만들어 놓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이명박은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외환위기를 불러온 것은 김대중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은 김대중 때부터도 아니다. 김대중은 그 나이에 외환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당시 그가 가진 대안이 많지 않았다. 권영길이 대통령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김대중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정말 신자유주의를 일소하고, 노동자 농민의 세상을 만들었을까?

노무현은 말했다. 새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차가 되었다고. 세종이 되고 싶었는데 태종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왜 그랬을까? 대통령이 되고 뚜껑을 열어보니, 설거지 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경제 위기를 넘겨보려고 내수 진작을 위해 남발했던 카드가 문제가 되었고, 북핵이 문제가 되었고, 당신 초기부터 한나라당은 “탄핵”은 언급하였고, 민주당 내에 노무현 세력은 애초부터 미미했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어떤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을까?

김대중과 노무현의 10년 세월이 “오늘 비정규 노동자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다”라는 한 문장으로 매도될 수 있는 것인가. 정말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노무현이 깽판을 쳐서 나온 결과인가? 김대중, 노무현은 정말 김영삼, 이명박보다 더 손가락질 받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보편적 상식 문제도 그렇다. 나는 보편적 상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거짓말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것이 나에게는 보편적 상식이다. 하는 말마다 거짓말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그것은 그 사람의 상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김규항은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명박의 상식은 상식이고, 김대중, 노무현의 상식은 상식이 아닌가? 왜 이중, 삼중 잣대를 들이대는가?

참여정부때 노무현 씹기를 스포츠로 삼던 그 사이비 좌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최장집, 손호철은 왜 말이 없는가? 노무현이 물러갔으니 이제 신자유주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단 말인가? 좌파들에게 묻고 싶다. 왜 당신들은 그렇게 “독선”적인가? 당신들은 정말 노동자, 농민의 편이긴 한 것인가?

김규항이 “예수전”을 쓰느라 너무 열심히 성경을 읽은 것 같다. 내가 그의 글에서 받은 메세지는 “너희 중 죄없는 사람만이 이명박에게 돌을 던져라”이다.

좌파들, 이제 고만 해라. 그동안 마이 묵었다 아이가.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우연히 김규항이 프레시안에 쓴 칼럼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를 읽었다. 김규항을 비롯한 좌파들의 생각이 어떤지 대강은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은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 극우들을 지극히 이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좋은 세상을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파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공의 적이므로,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고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필연적으로 양극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들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향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삶은 도태되어 버린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이 사회주의일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종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좌파들의 또다른 주장은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나 부시나 다를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시대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김규항,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좌파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다. 김규항의 질문에 내가 답하자면, 이명박이 없어지면 이명박이 없어진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한나라당이 사라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조중동이 폐간되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2배쯤 좋은 사회가 된다. 물론,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좌파들이 얘기하는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후진 사회는 아니란 얘기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유모차를 끌고나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대운하 같은 정신 나간 짓거리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돈많은 부자들은 지금보다 더 세금을 많을 냈을 것이며, 복지 예산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지금쯤 더 이상 북한 퍼주기 얘기는 안나왔을 것이다.

좌파들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폐간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하며, 조중동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과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과 조중동을 놔두고, 신자유주의와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념은 반대지만, 이명박과 같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못쓰고 하려면, 일단 이명박과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

좌파들은 이 사실을 당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무현을 까대던 진보 학계의 거두 최장집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별 말이 없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그렇다. 좌파들은 왜 이명박이나 조중동보다 노무현을 더 싫어했을까? 왜 그랬을까?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동일시하는 그런 좌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좌파들의 말을 실현하는 길은 혁명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서 2008년 혁명이 가능한 나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진정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시보다는 오바마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물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민노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가? 노무현 정부 때 아니었는가? 내가 노무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 한걸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좌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렸다. 오바마가 얼마나 진보적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주류인 흑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 역사는 참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파들이 열걸음을 원하는데 노무현은 단 한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좌파들은 그 한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한걸음이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그 오바마의 한걸음이 중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없어지면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조중동이 없어지면 우리는 두걸음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이명박과 싸우지 않고, 조중동과 싸우지 않고, 신자유주의 타파를 부르짖는 것은 거짓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아직도 모든 것이 노무현 탓

아직도 모든 것이 노무현 탓

퇴임한 지 두달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동네북이다. 수구들은 노무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혈안이고, 좌파들은 총선의 패배를 노무현 탓으로 돌리기 위해 안달이다. 수구세력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주된 정책 중의 하나인 지방분권화와 혁신도시 정책이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기다리고 있던 지방 정부와 지방 국민들은 손가락만 빨 것이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소위 좌파 세력들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노무현한테 돌리는 듯한 발언은 도저히 참기 힘들다. 김규항은 “노회찬과 홍정욱”이란 글에서 노회찬이 패배한 책임을 노무현에게 돌린다. 노무현이 한국 국민들에게서 “가치 추구”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명박이 당선되고, 홍정욱이 당선되었단다.

가짜 진보’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죄악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서 ‘가치에의 추구’를 앗아가 버렸다는 것일 게다. 이명박 씨는 5년 전만 같아도 대통령 후보로서 파멸하기 충분한 도덕적 결함들을 가졌다. 그러나 그 결함들은 노무현 정권 5년을 통해 더 이상 결함이 아니게 되었다. 2007년의 한국인들은 이명박을 도덕적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 이명박의 도덕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 같은 곳의 후보가 당선되는 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김규항, 노회찬과 홍정욱]

참으로 엿같은 소리다. 더군다나 이런 현실 인식은 좌파 세력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만큼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노무현이 추구한 가치는 “상식과 원칙”, 이 두가지다. 물론, 좌파들이 봤을 때는 아주 우스운 가치일 수도 있겠지. 민중들의 계급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상식과 원칙이라는 가치조차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나라가 이 잘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좌파의 위기는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의식을 자각하지 못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식과 원칙조차 수용되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로 대표되는 수구언론과 재벌, 사법부, 검찰, 고위공무원들 그리고 그 1% 수구세력을 30% 지지하는 지역주의 투표들. 이러한 문제들을 노무현 정부가 만들어낸 것인가? 이 문제들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죽 있어 왔고, 오히려 그 갈등은 노무현 정부 때 더 커졌으며, 이제 그 1% 수구세력들의 면모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노무현과 수구들이 대립할 때, 좌파들은 어느 편에 있었나?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 수구들의 편에 있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조선일보에서 강연을 하면서 30년간 조선일보를 봐왔으며 가장 좋은 품질의 신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친일과 군부독재 세력의 본산지 아닌가? 나는 노무현이 조선일보를 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누가 가치를 앗아갔나?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를 제외하고 민노당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반노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도 좌파가 망하는 건 모든 게 노무현 탓이다.

좌파들은 참으로 머리가 나쁘다. 노무현보다도 나쁘고 심지어 수구들보다도 머리가 나쁘다. 문제가 뭔지를 모른다. 적이 누구인지, 동지가 누구인지, 누가 연대할 세력인지 알지 못한다. 문제가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자신들의 소멸을 노무현 탓으로만 돌리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고, 좌파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노회찬은 홍정욱보다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처럼 뉴타운 사기극에 투표율 50% 이하일 경우에는 노회찬이 아니라 노회찬 할아버지가 와도 수구를 이길 수 없다.

노무현은 이제 무대를 내려왔다. 이제 노무현을 내버려 둘 때도 되지 않았는가? 노무현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노무현의 문제라면,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왔다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상식으로 살고 싶어하는 국민들이라면 그에게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봉하마을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좌파가 진보가 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총선, 네 가진대로 찍어라

총선, 네 가진대로 찍어라

이 글은 가진 것은 쥐뿔도 없는 “서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조중동문 같은 후안무치한 우리나라 대다수 언론들에게 속아서 엉뚱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쓴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집도 없이 월세나 전세를 살면서 “세금폭탄”이라는 말 한마디에 “종부세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얘기하기 위해 쓴 글이다. 지난 대선 때, 한 백수 젊은이가 나와서 취직이 안된다며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메가를 지지한다”는 그런 눈물겨운 코메디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쓴 글이다.

오래 전 김규항은 “비판적 지지”라는 투표 행위를 비판하면서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김규항은 그 글에서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비판적 지지했던 진보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 “털끝만큼”이라도 진보의 지분을 늘리기 위해서는 “네 이념대로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제 이념대로 순정하게 찍는 것, 그래서 한국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한국인들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동기화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것만이 한국인들이 제 처지에 가장 적절한 정치를 맞을 유일한 방법이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 한국사회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면 가장 반동적인 보수후보를 찍어라. 한국사회의 표면적 악취라도 우선 덜고 싶다면 가장 개혁적인 보수 후보를 찍어라. 그러나 한국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당선 가능성을 절대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되지 못한 정치평론일랑 걷어치우고) 그저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라. 진보에 외상은 없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

[김규항, 네 이념대로 찍어라]

언젠가 얘기했듯이, 나는 “비판적 지지”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정치적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선택”이라는 “행위”이지, 누구를 지지한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실제 투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에게 했다면, 그는 보수주의자다. 따라서 비판적 지지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개 위선적이다. 자기의 진보적 이념과 보수적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선택과 행위를 해왔는지 더 주의깊게 본다.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은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말로 하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그 말들이 아무런 달콤하고 장미빛 미래를 보여준다 해도 그 말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념대로 찍어라”는 김규항의 충고는 담백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이념적 지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념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바뀔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념을 잘 믿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이념의 변절자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한때 대한민국 대표적 빨갱이였던 박정희는 빨갱이를 때려잡는 반공의 화신이 되었고, 극렬 좌파였던 이재오, 김문수는 수구 정당에 들어가 호의호식하고 있으며, 대학을 다닐때 노동자, 민중을 위해 투쟁했던 대다수 학생회장들은 보수 정당에서 궁물이나 빨아먹는 존재들이 되었다.

선거에서 우리는 “이념”이라는 추상적인 기준보다 보다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잣대가 필요하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며 도덕적 파탄자를 지도자로 뽑는 국민들에게는 “이념”이라는 것은 씨도 안먹히는 얘기다. 하여 나는 주장한다. 당신들이 가진대로 찍어라. 당신들의 재산대로 찍어라.

당신이 고려대 같은 명문대를 나오고, 소망교회를 다니며, 강남에 십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살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다면 당신은 이메가와 한나라당을 찍는 것이 맞다. 이 말은 경제적 관점에서만 얘기한 것이다. 물론, 당신이 고소영 범주이면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진보를 지지할 수는 있다. 그것을 말릴 생각은 없다.

당신이 월세, 전세를 살면서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아이들 사교육비를 걱정하며 제발 양극화가 해소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메가와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종부세 대상자도 아니고 억대 연봉자도 아니면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현재 처지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당신의 어리석은 정치의식 때문에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이다.

총선에서 누구를 찍어야 될 지 모르겠다면 당신이 지금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헤아려 보시라. 그리고 당신이 가진대로 찍으면 된다. 이것이 서민이라 불리는 당신에게 드리는 기본적인 투표기준이다.

고래가그랬어

고래가그랬어

한때 김규항의 글을 좋아한 적이 있다. 그의 간결하고 돌려 말하지 않음에 열광했었다. 그 후 그의 대안없는 비판과 민노스러움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고래가그랬어> 라는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 받아 마땅하다. 내 아이에게도 가장 읽히고 싶은 잡지이면서, 정작 나를 위해서라도 구독하고 싶은 책이기 때문이다. <고래가 그랬어>의 세 돌을 맞이하여 서른 여섯 번째 책이 공개되었다.

<고래가 그랬어>의 세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동안 책을 만드느라 고생한 김규항을 비롯한 일꾼들에게도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도 이 책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고, 더 많은 아이들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