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남 할머니
올해 아흔넷의 이정남 할머니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전라북도 순창의 한 시골 마을, 따가운 햇볕에 고추가 붉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교회 마당에 노인 몇이 모였고, 그 중 이정남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지팡이 없이는 밖에 나올 수도 없었고, 지팡이를 짚고도 허리를 펼 수 없었다. 한 세기 가까운 노동으로 할머니의 뼈마디는 오그라들었다. 한쪽 눈꺼풀은 아예 떠지지가 않았고, 나머지 한쪽 눈도 성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혼자 몸을 건사하며 살아간다. 아침 저녁을 손수 차려 먹지만, 입맛도 없고 혼자 먹는 밥이 맛있을리 없다. 자식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갔다.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가려는 자식들이 있지만, 할머니는 서울 생활이 마땅치 않다. 혼자이지만, 평생을 산 고향이 훨씬 마음 편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 어렵사리 고추농사로 그 자식들을 키워냈다. 더러는 성공한 자식도 있었고, 더러는 힘든 자식도 있었으리라. 남편은 앞서서 먼저 세상을 떠났고, 가끔씩은 그 남편이 보고 싶기도 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꽤 큰 마을이었지만,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고, 이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만 몇 남아서 뙤약볕 밑에서 고추를 말리고 있다. 할머니는 그들 중 제일 나이가 많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말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친다. 어느 누구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잘 알고 계신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그저 평안하게 지내다 가면 그뿐, 더 바랄 일도 없다.
남겨진 고향은 할머니와 함께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