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 감상법
이명박 정권 들어 뉴스를 비롯한 방송을 거의 보지 않았다. 정권은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모든 언론매체를 장악했다. 언론이나 기자라 불리는 것들은 권력이 장악하기도 전에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것들의 야비함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으므로,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것들을 거들떠 볼 수 없었다.
그 와 중에 지난 몇 달간 유일하게 본방사수를 외치며 눈길을 사로잡은 프로그램은 바로 <나는 가수다>이다. 일명 <나가수>라고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가수들의 공연을 5백명의 청중이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는 일종의 생존 게임이다.
<나가수>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는 황폐해진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10여년간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계는 “아이돌”이라 불리는 수많은 그룹들에게 점령되었다. 아이돌들은 음악을 하는 가수라기 보다는 철저히 기획되고 만들어지는 일종의 공산품이었다. 거의 모든 아이돌들은 가수가 아닌 만능 엔터테이너들로 키워졌다. 산업의 논리가 가요계를 점령해 버리자,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줄을 섰다. 다양한 가수들이 사라지고, 획일화된 꼭두각시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가수는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다시 일깨워준 프로그램이었다. 노래는 산업이기 전에 음악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음악은 대중들의 삶과 사랑을 투영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지난 몇 달 간 <나가수>는 수많은 화제를 뿌렸고, 사람들의 환호와 비난을 동시에 듣곤 했다. 아이돌 산업이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을 사막화하는 동안, 사람들은 삶을 위로해 주는 노래와 가수들에게 목말라했다. 그것에 대한 반향이 이 프로그램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나타났다.
<나가수>는 일종의 생존 게임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경쟁이 있고, 순위가 매겨지게 된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나가수>에 출연하는 가수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청중들은 본질을 외면한 채 순위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순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냥 흥미를 더하기 위한 곁가지일 뿐이다.
본질은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들이 최선을 다해 그 무대를 준비하고, 노래하고, 청중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출연 가수들은 긴장도 하게 되고, 부담감도 갖지만 음악을 통해 청중과 교감하며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나가수> 출연 가수들에게 경쟁이나 순위는 별 의미가 없다. 그 순위라는 것은 단지 선곡에 따른 운과 청중평가단의 취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설령 7위를 해서 탈락한다 해도 아무도 그들이 실력 때문에 탈락했다고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과정을 즐기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삶은 몇 등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단 <나가수> 뿐만 아니다.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순위는 결코 본질이 아니다. 그 과정을 얼마나 즐겼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얼마나 행복했는가, 그로 인해 다른 이들도 행복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본말을 전도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위에만 관심을 갖는다.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삶의 모든 과정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모든 이들을 가치의 잣대가 아닌 존재로서 대해야 한다.
여러 말들이 난무하지만, <나가수>라는 프로그램는 충분히 지지받을만 하다. <나가수>가 아니었으면 임재범을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박정현이나 김범수 그리고 YB의 노래를 6개월 가까이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소라의 소름끼치는 <넘버 원>을 들을 수도, 조관우의 <하얀 나비>를 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분간 <나가수>는 유일한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나가수>를 통해 최고 가수들이 준비하는 최선의 무대를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통해 충분히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