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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노무현

죄없는 자만이 이명박에게 돌을 던져라?

죄없는 자만이 이명박에게 돌을 던져라?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서 이 여인을 돌로 쳐죽여야 되느냐고 묻는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7>

한겨레에서 자칭 B급좌파인 김규항이 쓴  “상식의 이름으로”란 칼럼을 읽었다. 김규항의 글을 좋게 봐주면, 이명박이 물러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명박이 물러난다고 해서 노동자, 농민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규항 같은 B급 좌파들이 걱정하는 것은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소위 “상식”이나 “개혁”을 주장하는 자유, 보수주의자들이 독식하는 것이며, 그들 자유, 보수주의자들은 이명박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부류라는 얘기다. B급 좌파들의 주적은 이명박이 아니라 김대중과 노무현이란 얘기다.

이명박이 물러나면 그들의 상식은 회복이 되는가? 알다시피 오늘 비정규 노동자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다. 더도 덜도 말고 땀 흘려 일한 만큼의 열매를 얻는 일이 상식의 회복일 농민들도, 신자유주의로 녹아나는 다른 많은 인민들도 마찬가지다.

보편적인 상식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의 처지에 따라 계급에 따라 상식은 다르다. 심지어 이명박씨의 몰상식 역시 적어도 그 자신에겐 엄연한 상식이다. 세상은 상식과 몰상식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상식으로 나뉘며, 어떤 세상인가는 결국 어떤 상식이 세상을 지배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 유행하는 ‘상식의 회복’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해서 이명박씨가 물러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들, 생존보다는 정신적 고통과 미감이 문제인 사람들의 상식의 회복인 셈이다.

<상식의 이름으로, 김규항>

우리나라의 노동문제가 1997년 김대중 집권으로 생긴 것인가? 김대중 이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절에) 정말 우리나라 노동자, 농민이 행복하게 살았을까? 김대중과 노무현은 아무 문제 없는 정부를 이양받았으나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드려서 지금 이명박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있는가? 1997년의 외환위기는 김대중 정부가 불러왔는가? 그 당시 김대중 말고 권영길이 집권했으면,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정말 보편적인 상식은 존재하지 않는가? 김규항이 보았을 때, 이명박은 상식적인 사람인가? 김대중, 노무현이 만들어 놓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이명박은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외환위기를 불러온 것은 김대중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은 김대중 때부터도 아니다. 김대중은 그 나이에 외환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당시 그가 가진 대안이 많지 않았다. 권영길이 대통령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김대중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정말 신자유주의를 일소하고, 노동자 농민의 세상을 만들었을까?

노무현은 말했다. 새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차가 되었다고. 세종이 되고 싶었는데 태종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왜 그랬을까? 대통령이 되고 뚜껑을 열어보니, 설거지 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경제 위기를 넘겨보려고 내수 진작을 위해 남발했던 카드가 문제가 되었고, 북핵이 문제가 되었고, 당신 초기부터 한나라당은 “탄핵”은 언급하였고, 민주당 내에 노무현 세력은 애초부터 미미했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어떤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을까?

김대중과 노무현의 10년 세월이 “오늘 비정규 노동자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다”라는 한 문장으로 매도될 수 있는 것인가. 정말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노무현이 깽판을 쳐서 나온 결과인가? 김대중, 노무현은 정말 김영삼, 이명박보다 더 손가락질 받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보편적 상식 문제도 그렇다. 나는 보편적 상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거짓말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것이 나에게는 보편적 상식이다. 하는 말마다 거짓말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그것은 그 사람의 상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김규항은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명박의 상식은 상식이고, 김대중, 노무현의 상식은 상식이 아닌가? 왜 이중, 삼중 잣대를 들이대는가?

참여정부때 노무현 씹기를 스포츠로 삼던 그 사이비 좌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최장집, 손호철은 왜 말이 없는가? 노무현이 물러갔으니 이제 신자유주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단 말인가? 좌파들에게 묻고 싶다. 왜 당신들은 그렇게 “독선”적인가? 당신들은 정말 노동자, 농민의 편이긴 한 것인가?

김규항이 “예수전”을 쓰느라 너무 열심히 성경을 읽은 것 같다. 내가 그의 글에서 받은 메세지는 “너희 중 죄없는 사람만이 이명박에게 돌을 던져라”이다.

좌파들, 이제 고만 해라. 그동안 마이 묵었다 아이가.

무릇 지도자란 이런 사람이어야

무릇 지도자란 이런 사람이어야

좋은 지도자는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당당할 수 있도록 한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지도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우리나라는 한때 그런 지도자를 가졌었다. 그는 이미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났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보면서,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무던히도 원칙과 상식을 말했던 사람. 내 생전에 강마에와 같은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보여준 가치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들을 창피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연주할 음악 앞에 작곡가 앞에 관객들 앞에 여러분들이 당당히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음악을 들은 한사람 한사람이 이 힘든 세상에 작은 위로라도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게 제가 이 시향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꿈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꿈을 같이 꿨으면 좋겠습니다.

유투브는 여전히 진실된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유투브는 여전히 진실된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20여년 전, 지강헌이라는 탈주범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이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돈 500만원을 훔쳤지만, 600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보다도 더 감옥에 오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자였다.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감히 잡범 주제에 특권층에게 불만을 갖다니… 그는 잡범이었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노건평(노무현의 형)이 “포괄적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렇다고 의심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다. 노건평이 돈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넘버 3의 송강호가 라면 먹고 뛴 선수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인 것이다. 그 앞에서 “임춘애”라고 얘기해봤자 날아오는 것은 주먹과 발길질 뿐이다.

죄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죄인이라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죄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법에 관한한 그들은 하느님이다. 설령 법에 규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습법까지 들고 나오는 이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노건평 같은 이는 그야말로 밥이다. 퇴임을 했어도 눈에 가시 같은 노무현을 욕보이고 잡아넣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만만하고 어수룩한 그의 형이 걸렸다. “포괄적 공범”으로 말이다.

노건평이 구속되는 날, 이명박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달려가 배추 아주머니와 또 멋진 사진 한장을 박아 주셨다. 배추 아주머니는 자애로운 대통령의 품안에 안겨 살기 힘들다고 눈물을 지었고, 이명박은 “눈물난다. 내가 기도해야 되는데…”라고 아주머니를 위로했다. 이명박은 농민들은 다 죽어가는데 농협이 이권이나 개입한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이 말은 노건평 관련 사건을 계속 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내놓고 있다.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8/1204/IE000991524_STD.jpg

이런 연출은 이명박이 얼마나 노무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의 형이 구속되는 날, 가락동으로 달려가 이런 역겨운 사진을 찍으며 노건평과 연관이 된 농협을 비난하는 센스. 퇴임을 한 노무현에게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이명박은 쥐박이라고 놀림만 받으니 질투가 날만도 하겠지.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전, 도곡동 땅 문제나 BBK 문제 등으로 곤혹스런 상황에 여러 번 직면했으나, 그때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수구 언론 조중동과 추상 같은 검찰이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심지어 자기 입으로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나왔어도 검찰은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법치였고, 지금도 그 법치는 여전히 견고하게 유효하다.

유투브에는 아직도 이명박이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이명박과 검찰을 조롱하고 있다.

오해는 마시라. 노건평이 죄가 있으면 당연히 구속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이 지었던 죄업이, 아니 죄를 지었다는 “정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의 부도덕과 무능이 다가오는 진짜 경제 위기에서 더 빛을 발할 것라는 사실이다. 그때도 사진 한 장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서민들은 왜 보수적인가, 정말 그들은 보수적인가

서민들은 왜 보수적인가, 정말 그들은 보수적인가

대한민국에는 두 종류의 서민들이 있다. 하나는 종부세 대상자이면서 스스로 서민이라 우기는, 쥐박이라 불리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서민(鼠民)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庶民)들이다. 물론,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쥐박이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이중서민들도 꽤 존재한다.

첫번째 부류의 서민(鼠民)들이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고 한 짓이라고는 종부세 무력화와 감세, 그리고 각종 부동산 규제 철폐 뿐이다. (그리고 전봇대도 2개나 뽑았구나.) 어떻게 해서든 땅값을 올려 일하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뿐인데, 대한민국의 경제적 최상위층들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고 지켜주는 이런 부도덕한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봐서는 당연하다. 물론, 잘사는 그들 중에도 간혹 양심을 가진 도덕적인 부자도 있겠지만, 극히 소수이겠지.

문제는 두번째 부류의 서민(庶民)이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매일매일 뼈빠지게 일을 하고도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부류다. 이런 서민들의 수는 전체 국민의 50%를 넘는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켜 줄 정치세력을 집권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현실은 두번째 부류의 서민들에게 자못 우울하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빈민 등 서민들을 대변한다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율을 5%를 넘지 못한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서민인 나라에서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은 집권은 커녕 지지율 5%를 넘지 못한다. 종부세 대상자 2%만을 위하는 정당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언제나 30%를 웃돈다. 이런 현실은 정말 많은 서민(庶民)들이 이중서민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서민(庶民)들은 극우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경제학자 도스타인 분데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은 그의 “유한계급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The abjectly poor, and all those persons whose energies are entirely absorbed by the struggle for daily sustenance, are conservative because they cannot afford the effort of taking thought for the day after tomorrow; just as the highly prosperous are conservative because they have small occasion to be discontented with the situation as it stands today.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요, 부자들은 오늘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보수적이라는 얘기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정치고, 신자유주의고 자기들의 관심사가 될 확률이 아주 적다. 선거에 악착 같이 투표하는 사람들은 강남에 사는 졸부들이지, 인력시장에서 하루하루 몸을 파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지난 번,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 위대한 강남은 공정택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민들의 정치의식이 떨어지고, 정치적 무관심과 체념이 커질수록 경제적 양극화는 더 커질 것이고, 정치권력은 한나라당과 같은 극우 보수 세력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것이다.

우리나라 서민(庶民)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할만한 정치세력을 선택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서민들의 계급적 사고를 가로막는 숱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아주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신문들이 언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공영방송이라던 KBS도 이미 이명박 졸개들에게 넘어가버리고, 아직도 1950년대 반공사상에 젖어서 좌빨 타령이나 하고 있는 수구 쓰레기 알바들이 네이버를 장악하고 있으며, 우리가 남이가 한마디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한나라당을 찍어대는 지역감정 추종자들이 있는한 서민들의 계급적 사고는 그야말로 요원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2~3% 지지를 받고 있는 진보신당의 심상정이 한미FTA를 들이대면서 노무현을 씹어돌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본 모순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서민들에게는 아무런 이슈가 되지 못한다. 결국, 이런 상식적인 토론이 가능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한다. 언론 문제, 지역감정 문제, 그리고 색깔론. 이런 문제들이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서민들의 이중서민 노릇은 지금처럼 계속된다.

또다른 해결책은 투표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이유는 브라질이 의무투표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룰라같은 노동자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며, 그를 지원하는 세력이 집권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투표율이 적어도 80%만 넘어가도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서민들이 보수화되었다고 해도, 아무리 국민들이 사기를 당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대한민국이 후진 나라라 하더라고 투표율 90%에서 이명박과 같은 사기꾼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는 없다.

정작 문제는 서민들의 보수화라기 보다는 서민들의 무관심이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당면 문제는 한미FTA가 아니고, 언론 문제고, 지역감정 문제고, 남북 문제다. 이들 문제가 선결되지 않고는 이명박이 아무리 깽판을 쳐도, 그 이후에는 박근혜가 정권을 잡을 것이고, 박근혜가 아무리 나라를 말아먹어도 그 이후에는 오세훈 같은 젊은 수구들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참으로 암울한 현실이다.

종부세가 합헌이었다면 그건 더 놀라운 일이다

종부세가 합헌이었다면 그건 더 놀라운 일이다

종부세에 관련된 위헌소송에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것은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선출된 것보다도 더 놀랍고 역사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런 판결에서 합헌 결정을 바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너무 순진한 사람이거나 또는 외계인일 가능성이 크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8명이 종부세 대상자다. 재판관의 90% 이상이 이해당사자라는 말이다. 이들 중 재산이 10억 미만인 사람이 두명뿐이다. 이 두명만 합헌 결정을 내렸고, 나머지 7명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헌법이라는 잣대로 종부세를 판단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재산을 기준으로 종부세를 재단한 것이다.

위헌 판결을 내린 7명의 재판관은 강만수보다도 더 교활하다. 이들은 종부세의 취지는 합헌이라고 박아놓고, 세대별 합산과 1가구 1주택 세부과에 대해 위헌과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종부세를 빈 껍데기로 만들었다. 차라리 강만수처럼 종부세는 징벌적 과세 운운하는 것이 더 순진하고 착해보인다.

종부세는 관습헌법으로도 위헌이다. 관습헌법.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몇년 전에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이 관습헌법에 의해 위헌판결 났던 것을 기억하는가? 관습헌법에는 서울이 수도로 규정되어 있기에 관습헌법을 고치지 않고는 수도를 옮길 수 없다고 주장했던 헌법재판소의 노친네들을 기억하는가? 마찬가지다. 종부세 같은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있는 세금이다. 감히 가진자에게 세금을 물리다니. 세금은 원래 천한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었다. 그런 세금을 상위 2%에게 물리다니 노무현은 그들에게 (오바마가 아닌) 오사마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만약 종부세가 헌재의 노친네들에 의해 합헌 판결이 났다면, 나는 정말 놀랐을 것이다. “내가 아는 대한민국이 이 정도 수준이 아닌데, 내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주류의 파렴치함이 이 정도가 아닌데” 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들은 그들의 저렴한 수준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말았다.

종부세, 행정수도 이전, 간통죄 등등의 문제를 헌재의 노친네들에게 물어본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그들의 도덕성이 일반인들보다도 딱히 낫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기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런 가치관과 관련된 문제의 판결을 맡기고, 그 판단이 최종이 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매트릭스의 오라클이 아니다. 그들은 선출된 권력도 아니고, 9명의 출신 성분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표할 수 정도로 분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수도이전이나 종부세 판결과 같은 파렴치한 결과가 계속될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강화되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선거 참여가 의무화되어야 하며, 국민투표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에 의해서도 발의되어야 한다. 브라질이나 호주처럼 투표가 의무화된다면, 이명박 같은 자가 대통령으로 뽑힐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지고, 오늘과 같은 헌재의 교활한 판결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진 자들이 무엇을 해주길 기대하지 말라. 주류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받기를 기대하지 말라. 당신이 강부자나 고소영이 아닌 한, 이명박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당신이 등신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냥 견디든지, 견딜 수 없으면 싸우든지, 선택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우연히 김규항이 프레시안에 쓴 칼럼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를 읽었다. 김규항을 비롯한 좌파들의 생각이 어떤지 대강은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은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 극우들을 지극히 이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좋은 세상을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파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공의 적이므로,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고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필연적으로 양극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들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향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삶은 도태되어 버린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이 사회주의일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종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좌파들의 또다른 주장은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나 부시나 다를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시대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김규항,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좌파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다. 김규항의 질문에 내가 답하자면, 이명박이 없어지면 이명박이 없어진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한나라당이 사라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조중동이 폐간되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2배쯤 좋은 사회가 된다. 물론,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좌파들이 얘기하는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후진 사회는 아니란 얘기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유모차를 끌고나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대운하 같은 정신 나간 짓거리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돈많은 부자들은 지금보다 더 세금을 많을 냈을 것이며, 복지 예산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지금쯤 더 이상 북한 퍼주기 얘기는 안나왔을 것이다.

좌파들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폐간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하며, 조중동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과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과 조중동을 놔두고, 신자유주의와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념은 반대지만, 이명박과 같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못쓰고 하려면, 일단 이명박과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

좌파들은 이 사실을 당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무현을 까대던 진보 학계의 거두 최장집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별 말이 없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그렇다. 좌파들은 왜 이명박이나 조중동보다 노무현을 더 싫어했을까? 왜 그랬을까?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동일시하는 그런 좌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좌파들의 말을 실현하는 길은 혁명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서 2008년 혁명이 가능한 나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진정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시보다는 오바마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물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민노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가? 노무현 정부 때 아니었는가? 내가 노무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 한걸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좌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렸다. 오바마가 얼마나 진보적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주류인 흑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 역사는 참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파들이 열걸음을 원하는데 노무현은 단 한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좌파들은 그 한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한걸음이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그 오바마의 한걸음이 중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없어지면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조중동이 없어지면 우리는 두걸음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이명박과 싸우지 않고, 조중동과 싸우지 않고, 신자유주의 타파를 부르짖는 것은 거짓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오바마, 미국의 노무현이 될까

오바마, 미국의 노무현이 될까

지금 개표가 한창이지만,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정치사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사에 있어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에서 비주류 그것도 흑인대통령이 탄생했다는 것은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좌파의 입장에서야 오바마의 당선이 미국의 극빈층이나 흑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못한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적어도 오바마는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을 가지고 정책을 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인물이다. 그는 최소한 부도덕한 이라크전 같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고, 의료 개혁을 실시해 국민 건강 보험을 도입하려 할 것이며, 양극화를 줄이려 노력할 것이다. 그런 노력들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런 방향으로 정책을 밀고 갈 것이다.

미국 경제 위기가 없었다면, 오바마의 당선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인이 아직 대다수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지난 8년간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를 말아드신 역사상 최악의 미국대통령 부시와 네오콘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부시의 삽질로 인해 어렵지않게 대통령이 되었지만, 부시가 망쳐놓은 경제를 수습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튼 비주류가 권력의 최고 정점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역사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도 훨씬 전인 2002년도에 노무현이라는 비주류 정치인의 당선을 경험했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는 정치적으로 노무현보다도 훨씬 좋은 환경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의회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고,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앞서고 있으니 정치적으로 민주당이 다수인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바마의 성공은 집권 초기에 얼마나 강력한 개혁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원칙과 상식을 가지고, 민중의 편에 선다면 노무현이 성공한 것처럼, 오바마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다시 한국이다. 미국이 지난 8년간의 과오를 씻기 위해 미국의 노무현인 오바마를 당선시켰다면, 우리는 이제 한국의 오바마를 찾아야 한다. 지난 8개월간 그래왔듯이, 리만 브라더스의 삽질은 계속될 것이고, 그들이 임기를 채울 수 있을지도 의심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을 찾아야한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정치 노선과 정책 방향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후보의 매력도 중요하다. 노무현이 이길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오바마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매력적인 후보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도 한국의 오바마를 찾아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누가 한국의 오바마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오바마의 당선을 축하하며, 그가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버락 오바마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19세기초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모짜르트만 없었다면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재인 모짜르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모짜르트 때문에 열등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모짜르트에게 늘 시기와 질투를 느꼈고, 모짜르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과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후에 사람들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위의 뛰어난 천재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자칭 진보정론지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주의2.0″이란 웹사이트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한겨레는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 말대로, 민주주의에 긴요한 시민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론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보겠다고 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이전에 이미 세워둔 계획이었다. 그가 퇴임을 해서 “민주주의2.0″이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이트가 개설되자마자 한겨레신문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 재개” 운운하며 새삼스럽게 유감이라는 사설을 날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노무현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민주주의2.0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조중동이나 한나라당과 정치적 이해 관계가 사뭇 다른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겨레가 노무현이 만든 토론사이트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겨레는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아니, 한겨레 뿐만 아니고, 민노당이나 최장집, 손호철, 김근태 등 이른바 얼치기 진보들도 마찬가지로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이 있다. 그동안 이들이 보인 행보를 보면, 조중동보다도 노무현에게 더 적개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은 아는 바와 같이 운동권 내에서도 비주류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세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이들은 내심 못마땅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진보 세력이 오합지졸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민주주의2.0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진보와 민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퇴임한 (고졸 출신의) 전직 대통령 따위가 어찌 그 자리를 넘보려고 하는가”하는 그 같쟎은 엘리트들의 우월의식이 노무현 살리에리 증후군의 본모습이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이라면 전직 대통령의 토론사이트 개설을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트가 잘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은 부수적인 문제고 그것보다 노무현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약, 김근태가 이런 사이트를 내놓았다면 한겨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설과 머릿기사를 동원해 그 사이트를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척보면 안다.

그런데, 문제는 김근태나 최장집이나 한겨레나 소위 그 잘난 엘리트 진보들은 노무현보다도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그들이 불쌍한 것이다. 노무현보다 앞서고 싶은데 늘 뒤떨어지는 그들. 노무현보다 다들 좋은 학교 나왔는데, 언제나 여론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 전형적 살리에리 증후군이다.

무능한 한겨레신문의 삽질 중 전형적인 예를 하나 보자. 네이버가 포탈로서 지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 중심에는 지식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한겨레신문이 2000년에 내놓은 “디비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디비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덜떨어진 잘난 진보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 서비스를 유료화해서 그 잘나가던 서비스를 말아먹고 만다. 결국 디비딕은 엠파스로 팔렸고, 네이버는 그 서비스를 흉내내어 지금과 같은 성공에 이르고 있다.

마케터 님이 지적한대로 한겨레나 소위 엘리트 진보들의 시기심 가득한 무능을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인터넷을 기반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중심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무현이어야 한다. 왜? 그가 진보 세력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회한 살리에리 같은 한겨레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노무현으로 인한 착각 그리고 민주주의2.0

노무현으로 인한 착각 그리고 민주주의2.0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나는 잠깐동안 착각 속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가 탄핵의 소용돌이를 헤쳐나오면서, 경제가 나름대로 안정되어 가고, 비록 더뎠지만 조금씩 상식이 회복되어 간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그때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이제 조금씩 살만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구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시작했구나, 이런 자부심을 가졌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도 우리나라의 걸출한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자랑을 했었고, 2차대전 이후 제3세계 국가 중에 한국만큼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어디있냐며 떠벌였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던 여러 외국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노무현이 물러나고, 수구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해버리자 나라는 6개월도 안되어서 휘청거렸다. 민주주의는 다시 70년대 독재의 시절로 후퇴해버렸고, 경제는 거덜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성취했다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는 너무나 뿌리가 약했다. 그 성취들은 수구신문들의 저주와 아파트 한채에 인생을 걸어버린 그 천박한 이기심을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참여정부 시절 2~3년은 우리 역사상 극히 예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 볼것도 없이 한 100여년의 역사만을 살펴봐도 어느 때도 민중이 이기고 권력을 쟁취한 적이 없었다.

민중들이 아주 짧은 순간 승리한 적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권력을 틀어쥔 적은 없었다. 동학혁명 때도 1년도 안되어 일본군에게 수십만 명의 농민들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제 치하 36년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독립운동은 중국과 만주 정도에서 명맥을 잇는 수준 아니었던가.

해방 이후 미국에 달라 붙은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판을 쳤고, 김구는 암살당했다. 419혁명은 516 군부 쿠데타로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박정희 군사 독재 18년.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전두환 일당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87년에 610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긴 했지만, 그 결과로 노태우와 김영삼이 연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결국 한차례 나라가 망하고서야 김대중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때도 박정희의 졸개였던 김종필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외환 위기로 나라를 거덜낸 수구정당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친일과 독재 부역으로 부를 쌓았던 수구 언론들이 위세를 떨쳤고, 나라를 거덜낸 인간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수구들과 주류들은 노무현을 탄핵했고, 결국 노무현도 무너지는듯 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고, 이해찬이 총리가 되고, 유시민이 장관을 하던 2년 남짓한 순간, 그 순간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최소한의 상식에 근거해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찬란한(?) 5천년 역사 중에 단 2년 정도 비주류가 정권을 잡아서 상식과 원칙을 외쳤다.

그 순간이 너무 감격스러웠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착각 속에 빠졌다. 나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역사적 당위로 우리 앞에 나타났고, 권력을 잡았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런 거지같이 초라하고 비루하고 비겁한 역사 속에서 “상식”과 “원칙”을 내세운 노무현은 비정상이었고, 왕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나라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분했다.

김영삼의 뒤를 이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일파가 여전히 판을 치고, 군부독재 세력이 여전히 득세하는 나라, 거짓말과 사기의 일인자들이 집권하는 나라, 중소기업들은 무너져 내리고, 비정규직은 거리로 내몰리는 나라, 종부세 대상자들이 서민이라고 우기는 나라, 역사적으로 볼때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나라다.

내가 노무현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이런 파렴치하고 비겁한 역사 속에서 단 한 순간 “상식”을 부여잡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초지일관 초심을 잃지 않는 단심을 가졌던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대의명분”을 위해 싸웠던 그리고 이겼던 유일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 노무현이 다시 민주주의 2.0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대통령에서 물러나서도 여전히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1.0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이 나라에 민주주의 2.0은 너무 과분한 이름이자 목표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은 우리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이며, 우리가 저들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수준 높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수준의 논의가 민주주의 0.1의 현실에 어떻게 이어지게 하느냐는 점이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정당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당원들이 주인이되고, 결정권을 갖는 그런 인터넷 기반의 정당을 만들어서 실제로 권력을 되찾아와야 한다. 기술적으로, 시스템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만, 과연 누가 그것을 추진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노무현, 아니 그가 직접 나서지 못한다면 그의 정치노선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민주주의 2.0이 성숙한 논의를 토대로 제대로된 정당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노무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축복이다.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

내 책상 컴퓨터 자판 옆에 있는 조그마한 책 한 권. 불교 초기 경전 중의 하나인 법구경이다. 일을 하다가 좀 시간이 나면 무심코 들춰 보면서 한 구절씩 읽곤 하는데, 그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얻는다. 법구경의 ‘더러움’ 편에 있는 구절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두터워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럽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마음이 때묻은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쉽다

수치를 알고 항상 깨끗함을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 조심성이 많고
진리를 보고 조촐히 지내는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힘들다

<법구경, 244-245>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하게 살면, 삶은 참 쉬워진다. 서너 달 사이 대한민국은 참 쉽게 사는 사람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견디기 힘들다. 이 조그마한 땅에 무슨 업보가 그렇게 많은 것일까? 반만년 동안 아니 해방 이후만 보더라도 이 동쪽의 조그마한 땅은 참 편안하게 지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날뛰는 세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사람이 이 척박하고 황폐했던 나라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를 추억하면서 견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그를 잇겠다고 나설 것인가? 그가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는 어떤 삶을 보여 줄 것인가.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할 것인가. 쉽고 살라고? 힘들게 살라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몇년은 참으로 고단한 시간이 될 것이다.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