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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달인,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민주주의의 달인,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평생 민주주의를 연구했다는 민주주의의 “달인”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서, “달인”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사회의 최상층 이익만을 보장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며,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 권력 운영방식에서 경찰, 사법, 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정부를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역으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또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

<최장집,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경향신문>

이명박 정부는 보수정부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반민주정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명박이 반민주가 되면 노무현 정부가 민주정부가 되니까.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정부였고, 따라서 노동자와 서민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최”신자유주의 정부라 상관없다. 노무현 정부 때 국가 권력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지금은 경찰이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고, 인터넷에서 정부 비판하면 구속되는 것은 당연하고,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하는 PD들은 기소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니까. 민주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명박이 반민주면 노무현이 민주가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마 최장집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서민들의 삶을 망쳐놓은 장본인이 자살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무현에 대한 증오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는 최장집은 민주주의 “달인”이라 불릴만하다. 배웠다는 인간의 인격이 이 정도로 이중적이라면 이명박은 양반 중의 양반이다.

민주주의의 “달인”이 민주주의를 농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2년만에 세상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2년만에 세상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2007년 6월 27일 노무현 대통령 청주 육거리 시장 방문.
그로부터 2년 후… 2009년6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서울 이문동 시장 방문.
단 2년만에 세상은 이렇게 좋아졌다. 이명박을 찍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깨닫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가슴 속 깊이, 아니 뼛 속 깊이 새기길 바란다. 그것만이 이 시대가 준 단 한가지 긍정적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것이리라.
오바마가 이명박을 가르치는 방식

오바마가 이명박을 가르치는 방식

오바마와 이명박의 공동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기자회견 말미에 오바마는 이란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What I will repeat and what I said yesterday is that when I see violence directed at peaceful protestors, when I see peaceful dissent being suppressed, wherever that takes place, it is of concern to me and it’s of concern to the American people. That is not how governments should interact with their people.

평화적인 시위에 폭력이 가해지는 것을 볼 때, 평화적인 반대가 탄압당하는 것을 볼 때, 그런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건, 그것은 저나 미국 국민들이 우려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정부가 자기 나라 국민들을 상대로 소통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President Obama Reiterates Concern About Iran’s Election, New York Times]

이명박이 이 말을 알아들었을리 만무하지만 (알아들었다면 오바마도 보복당할지 모른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평화적인 시위대에 폭력을 가하는 정부가 이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오바마 같은 대통령이 있었다. 아니, 오바마보다도 더 훌륭하고 위대한 대통령이 있었다. 이 빌어먹을 나라는 그 위대한 대통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 눈물만 나올 뿐 나는 할 말이 없다.

만약 오바마와 노무현이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까. 그들은 죽이 잘 맞았을 것 같은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북핵 문제도 잘 해결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제 이런 상상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바마가 이명박을 가르쳤지만, 이명박은 알아듣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핵심은 그게 아니야

핵심은 그게 아니야

간밤에 국세청 직원들인지 검찰청 직원들인지 모를 검은 양복의 기관원들이 들이닥쳤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그들은 “감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볼 수 없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초등학교 성적표부터 대학 졸업장까지 뒤져서 찾아냈다. 졸업장에 왜 내 이름이 잘못 나와있냐며 내 학번을 외워보라고 했다. 10년 전에 산 소프트웨어는 왜 샀냐고 물었고, 딸아이의 약은 어디다 쓰는 것이냐며 따졌다. 이 집구석에는 썩은 배추가 왜 이리 많냐며 지들끼리 키득거렸다.

나는 불려다니며 하나하나 해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체포하거나 기소할만한 짓 따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큰소리를 치려 했지만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신문지 몇 장만을 들고 그들은 떠났다.

아침이 되어 출근을 하려 하는데, 그들이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방에서 수갑을 꺼내 내 손목에 채우려 했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이러냐고 따져 물었다. 그들은 말했다.

“핵심은 그게 아니야. 우린 참을 수가 없었어. 넌 우릴 모욕했어.”

그들 중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자는 울고 있었다. 그것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미안해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 해도 수갑이 닫혀지지 않았다. 손이 몹시 아팠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기분이 착잡하고 더러웠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났다.

죄가 없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아무 죄가 없는 것이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잡혀가는 세상이었다.

검찰이 박연차 수사를 마무리한단다. 노무현을 죽인 이후에 그들이 더 이상 이 수사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게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6월의 장미 같은 정치인, 이정희

6월의 장미 같은 정치인, 이정희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 과시와 명예욕에 사로잡힌 열등한 족속들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막장 국회를 한 번 보라. 제대로 된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한나라당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민주당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희망없는 18대 국회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강달프 강기갑과 더불어 내가 작년부터 지켜보고 있는 정치인은 바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정희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배기다. 감히 단언하건데, 이정희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가장 성실하고 능력있는 정치인일뿐만 아니라 가장 주목받아야 하는 정치인이다.

그는 논리적이고 총명할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정치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단심이 보인다. 진정성이 보인다. 이런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정치판에서 이런 사람을 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이정희 의원이 이명박 정부에 맞서 단식에 들어갔다. 전직 대통령까지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이명박 정부이니, 우리같은 일반 서민이나 노동자는 아마 땅에 기어다니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정부일게다. 용산참사로 죽은 사람들은 다섯 달이 지나도록 장례도 못치르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이미 사라졌다. 삼천리 강산은 온통 포크레인 삽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나이 어린 초보 정치인 이정희는 이런 정부의 행태를 더이상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제가 시작하는 단식이 우리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머뭇거림을 없애는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처구니없이 빼앗겨버린 자유, 말할 자유, 모일 자유를 조금이라도 빨리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함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정희, 머뭇거리지 맙시다. 독선과 강압, 이제는 바꿉시다]

이정희 의원의 용기에 감사하며, 그의 투쟁을 전폭 지지한다. 그의 바람대로 그가 이 터무니없는 사기 정부를 끝낼 수 있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노무현이 떠난 빈 자리를 유시민, 한명숙, 이해찬과 더불어 이정희, 강기갑 같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함께 채워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쓰레기통에서 핀 6월의 장미 같이 아름다운 정치인, 이정희. 당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덧. 그의 투쟁을 지지하신다면 그에게 따뜻한 격려 한마디 해주시고, 후원도 해주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이런 정치인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정희 의원 홈페이지 바로 가기

가장 혁명적인 것

가장 혁명적인 것

김규항의 <예수전>을 보다가 깊이 공감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드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김규항, 예수전, p.248>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노무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무현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은 종종 있었지만, 노무현만큼 지배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물은 없었다. 결국 지배세력의 공포와 열등감이 노무현을 제거하려 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해서 그들의 시도를 원천봉쇄했다.

80년 광주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젖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 세대가 흐르고, 이제 노무현이 광주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광주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광주의 정신을 계승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의 길을 걸었지만, 노무현의 가치는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김규항의 정의대로 지배세력을 가장 위협했고, 지배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을 혁명의 가장 걸림돌로 지목하면서, 노무현과 지향이 같은 세력을 바리새인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규항과 같은 좌파들이 참여정부를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보다도 더 증오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이 오히려 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을까? 이 땅의 지배세력은 자칭 좌파라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예쁜 책이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묵상과 천착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누가 정치보복이라 하는가

누가 정치보복이라 하는가

노무현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탐욕과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그것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고, 불온한 꿈이었다. 그는 정의를 얘기했고, 상식과 원칙을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의 출신성분을 들먹였고, 그의 말투를 조롱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던 것은 기적이었거나 아니면 신이 이 땅에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류들은 당황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그들에게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에게 열광했던 사람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였다.

그는 단 한순간도 타협하지 않았다. 사방이 적이었고 지지자가 떠나갔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가 부여잡은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그 숱한 고난과 역경 그리고 온갖 방해와 비난을 물리치고 성공적으로 대통령의 임무를 마치지만,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노무현의 시대가 이 천박한 땅에서 얼마나 감사해야할 역사인지를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있을 때는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탐욕에 찌든 이들이 야만의 권력을 탄생시켰다. 그 야만의 권력과 쓰레기 언론들이 협잡하여 노무현을 죽였다. 그것은 정치보복이 아니고 살인이었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 아니 인정할 수 없었던 자들이 노무현을 죽였다.

그들의 무능력과 열등감이 검찰과 언론이라는 후안무치한 권력을 등에 업고 노무현을 죽였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악했다.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몰랐다.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란 바로 그런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누가 감히 정치보복이라 하는가. 그것은 백번을 양보해도 “포괄”적 살인이었다.

한때 진보라 불렸던 몇몇 신문들은 노무현이 죽자 그를 팔아 장사 밑천을 삼았다. 물론 이들도 노무현 죽이기에 가담한 공범이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알리바이만을 만들려고 했다. 간악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있을 때는 그의 소중함을 제대로 모르던 사람들도 슬퍼했고 미안해 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노무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 더이상 노무현은 없다. 아무리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도 노무현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그렇게 공평했다. 노무현이라는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을 내려 주었는데도 그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보냈다. 그리고 신은 노무현을 다시 거두어갔다.

이제 이 나라는 그 어리석음과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아니 노무현이 물러난 다음부터 이미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

노무현은 그의 말처럼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이 나라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 보고 싶다…

깊고 깊은 슬픔

깊고 깊은 슬픔

슬픔이 깊고도 깊었다. 슬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으로 나를 침잠시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밥 숟가락을 들어도, 화장실 변기에 앉아도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멈췄다.

노무현이 떠났다. 내가 사랑했던 정치인, 내가 존경했던 대통령, 내가 최후의 지지자가 되겠다고 말했던 그가 떠났다. 나는 그를 지키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지키지 못했다.

그는 역사 앞에 그렇게 홀로 서서 역사와 맞섰다. 그리고 그는 초연히 떠났다. 그가 감당했던, 그리고 감당해야할 역사의 몫이 너무도 컸다.

운명이었다. 정의를 가지고 역사와 맞서겠다던 사람의 운명이었다. 원칙과 상식으로 비루한 역사를 다시 세워보겠다던 사람이 맞닥드려야했던 운명이었다. 아무도 그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없었다. 서럽디 서럽도록 숭고하고 위대하지만, 나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부활하여 신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나는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 목놓아 울 뿐이다.

이제 그의 장난기 어린 말투도, 그의 사자후 같은 연설도, 그의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도 이 세상에는 없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이제 그가 떠났다.

그를 어떻게 놓아 드려야 할지, 그를 어떻게 떠나 보내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건만, 나는 여전히 그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생을 떠난 그가 진실로 진실로 안식하길 기도하지만, 이 부조리하고 비루하고 빌어먹을 역사는 끊임없이 그를 불러낼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죽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고도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노무현 대통령 님, 다음 생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그때도 잊지 않고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당신의 최후의 지지자였었노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당신이 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기도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 유서 중에서>

전직 대통령 예우법

전직 대통령 예우법

기억을 더듬어보면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컴맹들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정보시스템에 어떻게 접속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평생을 삽질로 살았던 자들이 21세기 정보기술 시대에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부도덕은 기본이고, 그들은 무능했다. 열등감이 뼈에 사무쳤다. 그들은 무능과 열등을 숨기기 위한 간교한 잔머리를 굴렸다. 이른바 “대통령 기록물 유출 사건”이다. 노무현이 생산해낸 수백만 건의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가져갔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그때도 검찰과 언론을 앞세웠었다. 법으로 규정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열람 권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협박을 하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일제 시대부터 전해온 비법이었다. 노무현의 수족들을 하나둘씩 수사 선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인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노무현은 더 버틸 수 없었다. 그때 노무현은 이런 편지를 쓴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편지에 따르면 이명박이 먼저 꺼낸 말이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확실히 세우겠다”는 것이었단다. 그것도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해서 말했단다.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말이다.

노무현이 기록물을 반환하고 나서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마치 노무현이 국가 기밀을 모두 빼돌린양 짖어대던 언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노무현의 수족들을 고발하겠다고 으르렁대던 검찰도 이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도 노무현을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고, 노무현은 그렇다면 내가 검찰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검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전직 대통령 예우법이었다.

그 이후, 검찰과 국세청은 노무현과 그 주변을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궐선거 일정에 부합하도록 어제 노무현을 검찰로 불렀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관없었다. 노무현의 부인과 조카 사위가 돈을 받았다는데 그 돈이 뇌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정황이 그렇다고 얘기할 뿐이었다. 검찰은 노무현과 관련해서는 “정황”과 “상식”과 “포괄”을 들이댔다. 물증은 없었다. 개의치 않았다.

노무현을 검찰청으로 불러 모욕을 주고, “쇼”를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노무현은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노무현이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는 빌미를 미리 차단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한달 내내 검찰과 언론을 통하여 3족을 멸해야하느니, 패가망신을 시킨다느니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무현을 모욕주고 협박했다. 심지어 대통령의 특수활동비까지 뒤졌다.

이것이 그들의 전직 대통령 예우법이었다.

노무현이 현직에 있었을 때, 선거에 관련된 말 한마디 했다고 대통령을 탄핵한 자들이었다. 정말 그들이 노무현이 뇌물을 받았다는 물증을 확보했다면 그들은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노무현을 수갑 채워 서울로 압송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확보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박연차를 겁박하여 얻어낸 진술뿐이었다.

노무현을 구속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기소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입을 쓱 닦아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한 일주일만 지나면 사람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노무현을 전두환, 노태우 급으로 전락시켰다고 환호작약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이 세운 이 확실한 전통이 이명박을 비켜가지는 않을 것 같다.

노무현이 봉하마을에서 안식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역사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진실을 가슴에 담고 최초로 승리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물러났어도 그는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그의 얼굴을 보면,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도대체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왜 역사는 그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왜 나같은 놈은 그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나 그를 더 부여잡아야 하는 것일까?

노무현은 자기를 놓아달라고, 자기를 버려달라고 말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노무현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그 상징이 될 수 있을까? 노무현이 떠나간 자리를 누가 메울 수 있을까? 그를 버리려고 해도, 뿌리치려 해도 왜 그는 또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노무현 자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지지자들과 그의 반대자들은 끊임없이 그를 불러내고 또 불러낼 것이다. 그것이 그의 숙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가슴에 단심을 품고, 진실을 부여잡고, 역사에 당당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숙명.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들의 숙명.

그의 안식과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짊어져야할 숙명에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느 시대든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한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 “경제를 살려 주세요” 하면서 눈 앞에 이익에 전전긍긍한다. 오늘날 이러한 세태는 극에 달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고, “도덕”을 말하고, “상식”을 말하면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한 것들이 밥먹여주냐고 하면서.

노무현과 같은 사람은 늘 분란을 일으킨다. 그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중요함을 깨달은 소수는 열성 지지자가 되었고, 가치가 밥먹여주냐며 비웃는 사람들은 그를 증오한다. 특히, 기득권층에게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행동 방식이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죽어야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다. 그래야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가 편안해진다.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 드물긴 했지만, 더러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암살당하거나 거세되었다. 노무현이 가치를 추구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지만,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면서 최초로 성공한 정치인이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몇 안되는 드문 경우였다. 이 나라의 기득권층은 불안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어야했다.

노무현은 친일과 군부독재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좌파라 불리는 민주 운동권 진영에게도 참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에도 같은 당 내부에서 노무현 끌어내리기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대통령은 커녕 후보조차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노무현은 어느 진영에게나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였다.

문제는 아무도 노무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무현 지지자들이야 그렇다쳐도, 노무현을 증오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노무현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다.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순탄할 수 없었다. 언론들은 연일 노무현을 깍아내렸고, 노무현 욕하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국회는 그를 탄핵했다. 그것은 가치를 추구한 자가 성공을 했기에 치루어야하는 댓가였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노무현은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진실을 말했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마법같이 성공했다. 반대자들에게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더욱더 없어져야할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인생은 에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노무현의 삶은 그것을 또렷히 보여주었다. 그는 실패와 실패를 거듭했고, 수많은 위기에 쳐했었지만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기적이었고 마법이었다. 노무현은 그 수많은 난관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맞섰고, 절대 꼼수나 잔머리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노무현의 힘이었고, 노무현의 가치였다.

노무현의 대통령 선거 출마 연설을 기억하는가?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육백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본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역사를 만들수 있다.

노무현이 있었기에 노무현이 승리했기에 우리들은 떳떳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역사 앞에 당당하고자 했고, 그렇게 살았던 정치인이다. 저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저런 울림은 아무나 줄 수 있는게 아니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 한다. 가치를 말하고 가치를 위해 산 사람이라면 돈 10억에 그 가치를 팔지는 않는다. 진짜 부정부패를 하는 자들이라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이 한다. 단돈 10억에 자기가 추구했던 삶을 버리지는 않는다. 누가 나한테 10억을 줄테니 한나라당을 지지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 돈을 받을 것인가? 나는 받지 않는다. 나같은 필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노무현 같은 인물이 그러하겠는가.

물론 이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무현과 검찰의 주장이 맞설 때, 누구를 더 신뢰할 것인가. 노무현과 언론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노무현과 한나라당 또는 이명박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설령 현행법 상 불법의 소지가 있다 한다면 그 응분의 댓가를 치루면 된다. 만에 하나 검찰이 노무현을 구속시키더라도 그들은 노무현을 죽일 수 없다.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한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접을 생각은 없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노무현을 버린다면, 또 그래야 한다면 나는 그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우리 현대 정치사에 노무현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너무 공허하지 않겠는가.

노무현을 버릴 수 있는 때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노무현을 찾지 않고도 또는 노무현의 가치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을 때이다. 그때까지 노무현은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대한 정치인일 것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일희일비하지 말고, 노무현이 돌을 맞을 때 그 옆에서 같이 돌을 맞으면 될 것이다. 분노할 필요도 없다. 노무현을 죽이고자 한 화살이 결국은 다 저들에게 되돌아갈 것이기에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의연하게 그를 믿고 지켜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