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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를 다시 읽는다. 그것은 산티아고 길을 걷기 위한 준비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 길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p. 31
“사도 야고보가 그대와 함께하여 그대가 발견해야 하는 유일한 것을 보여주기를.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느리게도 걷지 말 것이며, 언제나 길의 법칙과 요구를 존중하며 걸어가기를.”

pp. 41-42
“지혜로 향하는 길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합니다. 첫째, 그 길은 아가페를 포함해야 합니다. […] 그다음으로는, 살아가면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죠. 써보지 못한 검이 녹슬어버리고 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말이죠.”

p. 57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길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표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 언제나 길이기 때문이죠. 길은 언제나 우리가 걸은 만큼 우리를 풍성하게 해줍니다. […] 삶의 목표를 가질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와 그 길을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나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p. 98
“사자(使者)는 오직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개입합니다. 그는 교회의 황금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황금은 땅에서 온 것이며, 땅은 사자의 영역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와 돈의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그는 자기 마음대로 흩어져버리고 맙니다. 또한 쫓아내버리면, 우리는 그가 가르쳐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고 맙니다. 그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두루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의 권능에 현혹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에게 소유됨과 동시에 선한 싸움에서 멀어지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p. 103
사자, 즉 경멸적인 의미 없이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는 땅의 힘을 지배하는 영이며 인간의 욕망에 기생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악마는 때로 마술적 작용에 쓰이기도 하고 때로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결코 일상적인 일에 관여하는 친구나 조언자는 아니었다.

p. 137
“은하수는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길을 안내해주죠. 어떤 종교도 모든 별을 한데 모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주는 거대한 빈 공간으로 변해버려 그 존재 이유를 잃고 말 겁니다. 각각의 별, 그리고 각각의 인간은 자신만의 공간과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 하얀색, 혜성, 유성, 운석, 성운, 고리 모양의 각기 다른 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똑같이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상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공간에 흩어져 있는 수없이 많은 각기 다른 존재들이죠.”

p. 156
아가페는 소멸시키는 사랑입니다.”

pp. 157-158
“열정은 대개 우리 삶의 초반부에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시기에 인간은 아직 신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자신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인형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고 작은 장난감 병정들이 움직이기도 하죠.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열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아가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예수께서 행하는 기적이나 지혜로움, 바리새인, 사도들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에게 곧장 왔죠. 오직 열정에 이끌려, 행복한 모습으로 온 것입니다.”

p. 179
“그럼에도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가장 확실한 사실인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려고 하죠. 바로 그 죽음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실현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준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미지의 것에 대해 공포를 느낍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제한되어 있음을 잊어버리는 거죠.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잃을 게 없기에 더욱 용감해지고 더 멀리까지 정복해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pp. 208-209
“제자는 자신을 이끄는 이의 걸음걸이를 결코 흉내내어서는 안 됩니다. 삶을 바라보고, 고난과 정복을 체험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는 것이니까요. 가르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그 가능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요.”

p. 338
그는 말했다. 우리를 신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닿게 해주는 것은 열정이지, 수백 수천의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고. ‘비밀 의식’이나 ‘심오한 교리를 따르는 입문식’이 아닌, 삶이 기적임을 믿으려는 의지가 기적을 낳는 것이라고.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혹은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이 뇌의 활동으로 생겨난다고 믿고 있다. 뉴런과 시냅스의 패턴을 연구하면, 첨단 장비로 뇌 영상을 찍어 보면, 마음이나 의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있을까?

지난 번에 얘기했듯이,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마음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정의하지 못한다. 마음이나 의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뇌 활동의 산물인지는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물리요법가이자 UCLA 신체운동학 교수였던 발레리 헌트(Valerie Hunt)는 인간의 두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두뇌를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요소라고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왔다고 생각한다. 두뇌는 단지 정말 훌륭한 컴퓨터일 뿐이다. 하지만 창조성, 상상력, 영성 등의 모든 것과 관계되는 마음의 측면들을 두뇌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은 두뇌가 아니다. 마음은 바로 이 에너지 장 속에 있다.”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 273>

아무리 좋은 현미경으로 신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과학으로 뇌를 아무리 연구해도 마음이나 의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몸이 ‘참나’가 아니 듯이, 우리의 뇌가 마음이나 의식은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 유명한 생명과학자(혹은 생물학자)의 강연에 갔다가, 질문 기회를 얻어 생명이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생물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얘기를 했다.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대사를 하고, 자극에 대해 반응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며, 발생, 생장, 생식, 유전, 적응과 진화를 하는 개체라고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을 나열한 것이지, 생명의 정의는 아니다. 그가 말한 생명의 특성도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인가? 수 년의 동면 기간 동안에 먹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아르테미아 새우는? 아름다운 조직으로 성장하고 복제하는 수정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과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명에 대한 면밀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생명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를 내렸지만, 그 어느 것도 생명이 무엇인지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Tsokolov, S. A., 2009, “Why is the definition of life so elusive? Epistemological considerations,” Astrobiology, Vol. 9, No. 4, pp. 401-412.)

그러던 중,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서 전율하였다.

우주에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현상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 의식의 상태가 ‘티끌들의 아물거림’의 조직과 형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모든 외적 형태란 내적 의식의 표현물이었다.

[생명]과 [의식]은 하나이고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생명]이다”라거나, “저것은 [의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식은 곧 생명이었고, 생명은 곧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만들어낸 ‘창조적 권능‘은 우주의 배후와 그 속과 그 너머에 있는 [신성한 우주심](Divine Universal Mind)이었다.

I realized there was nothing solid in the universe, everything visible was manifesting a differing ‘state of consciousness’ which determined the composition and form of the ‘shimmer of motes’.

Therefore, all outer form was an expression of the inner consciousness.

LIFE and CONSCIOUSNESS, I realized, were one and the same thing.

It was impossible to say ‘This is LIFE’ and ‘That is CONSCIOUSNESS’.

Consciousness was Life, and Life was Consciousness and was the ‘Creative Power’ of both; DIVINE UNIVERSAL MIND’ beyond, within and behind the universe.

<그리스도의 편지, 정신세계사, p. 44>

이 책을 통해 “생명은 의식이다”는 언명이 가장 정확한 생명의 정의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물질 세계만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민주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민주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도널드 핀켈(Donald L. Finkel)  교수가 쓴 <침묵으로 가르치기>를 읽다가 ‘민주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을 가르치든지 가르치는 사람(교사)이 민주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탐구 활동이란 것이 본래 민주적이다. 탐구할 때는 진실을 찾기 위해 권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2.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교사는 민주사회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낼 민주시민을 길러낼 책임을 느낀다.
  3. 교사의 임무는 학생의 성격 개발에 힘쓰는 것이다. 학생의 독립심, 자신감, 자율성, 판단력, 책임감, 집단의 일원으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성격 특질들이 바로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기본 덕성이다.
시를 쓰는 법

시를 쓰는 법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는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나무에 대해선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대해선 대나무에게 배우라.
그대 자신이 미리 가지고 있던 주관적인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 강요하게 되고 배우지 않게 된다.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시는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 대상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안에 감추어져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일이 일어난다.
아무리 멋진 단어들로 시를 꾸민다 해도
그대의 느낌이 자연스럽지 않고
대상과 그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때 그대의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위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마쓰오 바쇼, 류시화 옮김, 바쇼 하이쿠 선집>

그대가 적을 사랑한다면

그대가 적을 사랑한다면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잘못되게 생각할 수 없고, 잘못되게 말할 수 없으며, 잘못되게 행동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안다면, 그때 그대는 어디에도 미움을 가져오지 않는다. 마음은 모든 선과 악의 선두 주자이다. 마음은 정화되면 좋은 카르마를 창조한다. 마음이 오염되지 않으면 그대의 행위는 순수할 것이고 세상도 순수할 것이다.

자애는 사랑과 친절을 가져오고 그대를 건강하게 만든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 좋은 일이다. 이 세상에서 증오는 결코 증오를 통해 중단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그것은 중단된다. 이것은 영원한 법칙이다. 미국의 사랑이 없고 인도의 사랑이 없다. 사랑에는 차이가 없다. 마음은 놀라운 힘이다. 그대의 온 존재에 사랑의 생각이 구석구석 스며들게 해 보라. 그대의 순수한 가슴으로부터 그것이 나오게 하라. 그대가 적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미르카 크네스터, 마음에 대해 무닌드라에게 물어보라, p. 303>

지난 주말, 프랑스 파리에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무닌드라의 법문을 읽는다.

마음과 사띠

마음과 사띠

아나가리카 무닌드라(Anagarika Munindra)는 마음과 사띠(Sati)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음은 본래 색깔이 없다. 그것이 욕망으로 물들 때 우리는 그것을 ‘탐욕스러운 마음’이라 부른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화내는 사람’ 혹은 ‘화내는 마음’으로 불린다. 사띠(마음챙김)가 없으면 마음은 이 분노의 영향을 받는다. 분노는 마음을 오염시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독을 만든다. 그러나 마음은 분노가 아니며 분노는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탐욕이 아니고 탐욕은 마음이 아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마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 ‘마음’은 단지 ‘아는 능력’,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미르카 크네스터, 마음에 대해 무닌드라에게 물어보라, p. 23>

무닌드라는 사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띠(마음챙김)는 깨어 있음이고, 알아차림이고, 기억하는 것이고, 기민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잊지 않고 단지 알아차리고, 대상에 온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 사띠는 지금 이 순간에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미르카 크네스터, 마음에 대해 무닌드라에게 물어보라, pp. 23-24>

순간순간을 온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 맑게 살 수 있다면 누구나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시간에 대하여

시간에 대하여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환상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이다. 이 시간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거의 모든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과 같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라는 관념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라는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싯다르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그래요, 싯다르타.” 바주데바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타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타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무아지경에 빠져 황홀한 상태로 말하였으니, 이러한 깨달음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하였던 것이다. 아,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pp. 157-158>
타인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이해

그는 그들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과 통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였으며, 그 자신도 더불어 그런 생활을 하였다. […]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런 일들을 이제 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pp. 189-190>

우리 말이 될 수 없는 말

우리 말이 될 수 없는 말

이오덕 선생은 우리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나누었다.

  1. 어려운 한자말
  2. 귀로 듣거나 우리 글로 적어놓은 것을 보아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중국글자말
  3. 일본사람들만이 쓰던 중국글자말을 그대로 중국글자음으로 읽고 쓰는 말
  4. 일본식 말법을 그대로 따라 쓰는 말
  5. 서양말법 따라 쓰는 말
  6.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버젓한 우리 말이 있고 우리 말로 쓸 수 있는데도) 그대로 쓰는 말

<이오덕, 우리 글 바로 쓰기2, p. 354>

우리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 바로 이오덕 선생의 <우리 글 바로 쓰기>다. 모두 5권으로 되어 있지만, 시간이 없으면 1권만이라도 꼭 읽어야 한다.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