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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삶의 목표

진정한 삶의 목표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다. 그것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이 세계는 항상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욕망은 고통이다

욕망은 고통이다

마음속 꿈틀거리는 욕망을 향해
온 세상의 돈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해도
그 욕망이 충족되는 일은 없습니다.

충족되기는커녕, 쾌감 뒤에는
허무와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욕망은 계속해서 꿈틀거립니다.

욕망이 실현되어 얻어지는 쾌락은 찰나일 뿐,
‘욕망은 고통’이란 걸 깨닫는다면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마음이 잦아듭니다.

<코이케 류노스케, 초역 부처의 말, 포레스트북스, 2024, p. 88>
마하라지 가르침의 핵심

마하라지 가르침의 핵심

  1. 현시된 존재는 현상이다. 감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시간적으로 유한한 현상은 영상, 꿈, 환영이다. 그러므로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 실체는 전체적이고, 영구적이며,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될 수 없는 실재이다. 누가 이것을 말하는가? 물론 의식은 스스로를 인식하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행위(인식하는 자는 없다)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은 비록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찾는 자는 찾고 있는 자와 같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2. 절대로서의 나는 전체적인 잠재력이고 알려진 자와 알 수 있는 것의 근원이며, 알려지지 않는 것과 알려질 수 없는 것의 드러남이다. 상대로서의 나는 모든 형상의 전체, 비현시된 알려지지 않는 것의 알려진 모든 것이다.
  3.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오직 참나만이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속성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한 주체로서 말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나’라는 생각은 환상적인 속박이다. 나를 저절로 사라지게 하라. 그러면 진정한 나 자신이 드러난다.
  4. 현상적인 나는 의식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떻게 속박 속에 있는가? 본질적으로, 실체가 어찌 해탈이 필요할까? 해탈은 단지 해탈을 필요로 하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없애는 것이다.

<라메쉬 발세카, 담배 가게 성자, 책세상, 2009, pp. 402-403>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에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임태주, 어머니의 편지>
에고와 깨달음

에고와 깨달음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음의 이미지를 만들어 갑니다. 유령같은 이 이미지를 흔히 에고라고 부릅니다.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우리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에고란 마음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할 때 생성되는 거짓 자아를 가리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 센시오, 2019, p. 27>

존재에 대한 인식을 되찾고, ‘느낌-자각’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 깨달음은 그저 존재와 하나됨을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깨달음은 헤아릴 수도 파괴할 수도 없는 그 무엇, 본질적으로는 당신이지만 당신보다 훨씬 위대한 무언가와 연결된 상태입니다. 이름과 형태 너머에 있는 당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이 생겨납니다. […] 존재와의 연결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각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 센시오, 2019, p. 18-19>

가볍게 가게, 친구여

가볍게 가게, 친구여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 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짐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 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 있지. 두려움과 자기 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 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올더스 헉슬리, 섬>
참자아 탐구

참자아 탐구

참자아 탐구는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는 생각을 억누르지도 않으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정신차리고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참자아 탐구 수행의 목적은 마음의 근원에 머무는 데에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진정한 자기가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거두어들이면 결국 근원에 도달하게 된다.

초기 단계에서는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서 생각하는 자기에게로 주의를 돌리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일단 ‘나’라는 느낌에 대한 주시 또는 각성 상태가 확립되면 더 이상의 노력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때부터는 행위의 과정이기보다는 존재의 과정이며, 그것도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니라 저절로 존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미 아무런 노력 없이 존재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는 늘 현존하고 있으며 늘 체험되고 있다. 반면에 존재 자체가 아닌 것(이를테면 육체와 마음)이 존재인 양 가장하려면, 의식 차원에서는 아닐지라도 잠재의식 차원에서는 끊임없이 정신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자아를 탐구하는 수행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나라는 생각’에 집중하는 정신적인 노력은 사라지고 존재 자체에 대한 체험만 남는다. 궁극적으로 참자아는 무엇을 한 결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깨닫는다. 이에 대해 스리 라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상하지 말라. 그냥 존재하라!
그대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말라. 그냥 존재하라!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그냥 있는 그대로 있어라!

<데이비드 갓맨 편집, 있는 그대로, 한문화, 2004, pp. 100-101>

하지 말아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1. 너무 빨리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2.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3. 세상이 변해야 내가 안전하거나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4. 나의 삶에 일어나는 일은 좋든 나쁘든, 크든 작든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5. 지금까지 변화시키지 못한 상황을 통제하는 방법에 집중하거나 반응하거나 염려하지 않는다.
  6. 침체되어 있을 때 느끼는 방식을 측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7. 소극적으로 원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8.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9. 즐거운 상태가 되기 전에는 좋은 느낌을 기대하지 않는다.
  10. 이 모든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11. 밸브가 닫힌 상태이거나 문제 가운데 있을 때는 영감이 없는 행동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12.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어도 추하고 어둡고 부패한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13.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어”라고 하면서 최종 결과를 기다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
  14. 나쁜 느낌이 들어가 밸브가 닫혔을 때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다.
  15. 밸브가 닫히게 하는 것에 집중된 생각을 중지한다.
  16. 밸브가 닫혔거나 단절된 존재에 따른 슬픔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는다.
  17. 병에 관한 이야기로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일을 중단한다
  18. 문제 찾는 일을 중단한다.
  19. 갈망하지 않는다.
  20.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자기 밖에 있다는 생각을 중단한다.
  21. 원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2. 비록 내가 옳더라도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느낌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23. 후회하지 않는다.
  24. 새로운 사업이나 프로젝트, 모험, 활동, 관계 등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먼저 각본을 쓰고 충분히 오랫동안 열정적인 에너지를 흘려 보낸다.
  25. 생각하지 않고 느낀다.
  26. 나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고 느낀다.
  27.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다.
  28.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나를 허락한다.
  29. 나는 김 씨나 이 씨가 아니다. 목수나 비서도 아니다. 나는 생명력이다.
  30. 포기하지 않는다.
<린 그라본, 여기가 끝이 아니다, 나비 스쿨, 2021, pp. 308-311>
무심재(無心齋)

무심재(無心齋)

무심재는 건축주가 일찍이 지은 이름이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심은 무분별심을 뜻하는 것으로 ‘분별이 없는 마음, 망상이 없는 깨어있는 마음’을 말한다. 즉, 이해득실로 귀결되는 분별에서 벗어나 거대한 우주의 흐름에 올라타는 맑고 밝은 마음의 상태이다. 하지만 무심한 주거공간을 상상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다. 긴 논의 과정 끝에, 무심재는 주인이 귀가하여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풀려나 오로지 충만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됐다.

조그만 인간 존재 의미를 거대한 자연과 병치시켜 유장한 흐름 속에 삶도 죽음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그런 집. 그것을 이루기 위해 먼저 대지가 위치한 계룡산의 뛰어난 자연경관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 집의 모든 거주하는 방들은 산을 면하는 쪽에 배치하였다. 거실과 서재에는 바닥부터 시작되는 큰 창으로 넉넉하게 계룡산 능선을 끌여들였다. 특히 2층에 위치한 거실은 창을 향해 점점 열리는 각도의 벽을 이용해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코니 난간도 최대한 투명하게 디자인 하였다. 안방과 손님방의 창은 가장 오래 머무르는 가구(침대)의 높이를 기준으로 하늘과 산과 숲이 다가오게 하였고, 다락의 천창은 밤하늘의 별을, 계단실 창은 걸어 올라오면서 계룡산 최고봉인 삼불봉을 마주한다.

무심재는 아주 간결하고 소박한 연면적 60평도 안되는 작은 집이다. 조형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대지 고저차에의 대응, 그리고 박공지붕으로 인해 보통의 주택과는 다른 내부 공간 높이를 지닌다. 재료와 색채, 디테일은 검박하게 결정되었지만 공간의 프로파일은 은근 당당하며, 풍부하고 기품 있는 볼륨과 다양한 시점을 제공한다. 모든 것을 더도 덜도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갖추려 했다. 그렇다 해도 무심하고자 하는 건축주의 분별 있는 마음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길 바란다.

<조항만, 건축문화, Vol. 502, March 2023, pp. 38-45.>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은 이엉이 덮이고
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迷惑)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

<법정 역, 숫타니파타, 18-19, 이레,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