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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Poetry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6일이나 되는 추석 연휴 내내 한없이 빈둥거렸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이나 읽어보자고 계획 아닌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찾아먹고, 평소에 자지않던 낮잠도 실컷 잤는데, 밤에는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 체중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는 딸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뒷산을 다녀왔으며, 하루는 고궁에 나갔다 하릴없이 쏘다닌 것이 전부였다.

정현종의 <시간의 게으름>을 읽고 행복했다. 6일이 살과 같이 흘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주세요.

<정현종, 시간의 게으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을 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 고요함에 대하여]
야마오 산세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라 말한다. 수양이 부족한 나는 때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때로는 가슴에 담아 둔 말을 참지 못한다. 때로는 말이 너무 많고, 때로는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쏟아낸다. 산의 고요함을 닮아야 할텐데, 나무와 바위의 침묵을 배워야 할텐데,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가 말했다.
기자와 똥꼬치마

기자와 똥꼬치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언론이라고 인정받을만한 주간지인 <시사IN>의 기자, 고재열 씨가 지하철 계단에서 아주 짧은 치마(그는 똥꼬치마라고 했다)를 입은 여자를 뒤따르다 느낀 불쾌함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곤경에 처했다. 많은 비난들이 쏟아졌고, 급기야 그는 그 글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했다.

고재열 기자가 올린 “지하철 똥꼬치마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읽고, 남자인 나도 무척 당황했다. 아무리 본인의 짜증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글을 올린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 글을 읽고 내가 받은 느낌은 마치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이나 “기생” 농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 글에는 여성 비하와 폭력적 표현이 넘쳤다. 본인도 밝혔지만, 무의식 중에 고재열 기자의 마초 근성이 반영된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고재열 기자와 트위터로 대화를 나는 마법사 님의 글을 보다가 고재열 기자의 “똥꼬치마” 글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재열 기자가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좌파는 섹시한 것을 섹시하다고 하지 못하고, 꼴불견을 꼴불견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인가 봅니다. 댓글이 장난이 아니네요.

나는 개인적으로 고재열 기자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좌파인지 수구 꼴통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올린 “똥꼬치마” 글이 좌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실수 혹은 잘못을 뉘우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장황한 사과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그렇게 장황하게 꼬치꼬치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마법사 님의 말대로 그는 적어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인간의 기본 품성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이 흔히 여성을 적대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과 생명의 기원이 여성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비로소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

철모르는 남자들이 자신 속의 짐승과 결별하고 아름다운 어른이 되길 바란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는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강은 슬픔을 위로하고 노동을 어루만졌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에 삽을 씻으며 절망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우며 흐르는 강으로부터 위안을 얻었다해도 고단한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연과 하나되면서 노동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고 슬픔을 씻을 수 있었다.

이제 강은 아무도 위로해주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삽과 포크레인이 강을 짓이길 것이며, 수십개의 댐은 강물을 가두어 버릴 것이다. 강변은 콘크리트로 뒤덮일 것이고, 그 위에 썰렁한 자전거 도로만이 덩그러니 놓여질 것이다. 강은 인간의 탐욕으로 그렇게 질식해 죽어갈 것이다. 강이 죽어갈수록 인간들의 병은 깊어질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아름다운 시는 더 이상 불려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들의 탐욕을 저주할 것이며, 나도 그들의 탐욕을 저주할 것이다.


출처 : “진짜 강변 걸어봐요, 4대강사업 하고픈가” – 오마이뉴스

이 아름다운 강변의 갈대를 어찌한단 말인가.

흔적 없는 삶

흔적 없는 삶

법정 스님의 법문집 <일기일회>를 읽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시 한 구절.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沼水無痕

<야보 선사, 금강경오가해>

이 시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녀지간이라도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아주 가끔 가다 평생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부부들을 만나곤 하는데, 나의 경험을 비춰 보았을 때 그들의 증언은 너무나 초현실적이어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몇 십년 간 같이 살을 맞대고 산 부부라도 가끔 말다툼을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다면 그 부부들은 이미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새해 들어서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딱 한 번 나를 열받게 했는데,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아내가 나를 열받게 하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아내는 나를 “밴댕이”라 놀려댄다. 대개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비아냥거릴 때 가장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이 “밴댕이 소갈딱지”인데, 이것도 여자들이 남자들을 틀짓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이다.

남자는 대체로 아량이 넓어야 하고, 이해심도 많아야하고, 대범해야 한다는 일종의 선입견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로부터 밴댕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사실 남자들 중에서 (나처럼) 꽤나 소심한 사람들이 여자 못지 않게 많다. 그 소심한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잘 삐지기도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사소한 일에도 열받곤 한다. 그런 남자들을 일방적으로 밴댕이라 몰아부치는 것은 그들을 너무나 억울하게 만드는 일임을 여자들은 알까?

안도현의 시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을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침묵하면서 사소한 것들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져 씁쓸했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2년 동안 7명의 여자들을 죽였다는 어떤 싸이코패스가 잡혔는데,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그런 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철거민들이 과격 시위를 한다고 하룻밤 사이 6명의 사람을 불 속에서 태워 죽게 한 어느 경찰청장과 그런 청장을 처벌하면 어떻게 법질서를 세우겠냐고 게거품을 무는 또다른 싸이코패스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친일과 독재에 부역했던 그런 자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나를 무척 열받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블로그질이나 하고 있는 나에게 무진장 열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세상 살기가 이리 쉽지 않은 것일까? 나는 살기 어려운 세상에 또다시 열받고 만다.

유투브는 여전히 진실된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유투브는 여전히 진실된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20여년 전, 지강헌이라는 탈주범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이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돈 500만원을 훔쳤지만, 600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보다도 더 감옥에 오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자였다.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감히 잡범 주제에 특권층에게 불만을 갖다니… 그는 잡범이었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노건평(노무현의 형)이 “포괄적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렇다고 의심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다. 노건평이 돈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넘버 3의 송강호가 라면 먹고 뛴 선수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인 것이다. 그 앞에서 “임춘애”라고 얘기해봤자 날아오는 것은 주먹과 발길질 뿐이다.

죄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죄인이라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죄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법에 관한한 그들은 하느님이다. 설령 법에 규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습법까지 들고 나오는 이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노건평 같은 이는 그야말로 밥이다. 퇴임을 했어도 눈에 가시 같은 노무현을 욕보이고 잡아넣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만만하고 어수룩한 그의 형이 걸렸다. “포괄적 공범”으로 말이다.

노건평이 구속되는 날, 이명박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달려가 배추 아주머니와 또 멋진 사진 한장을 박아 주셨다. 배추 아주머니는 자애로운 대통령의 품안에 안겨 살기 힘들다고 눈물을 지었고, 이명박은 “눈물난다. 내가 기도해야 되는데…”라고 아주머니를 위로했다. 이명박은 농민들은 다 죽어가는데 농협이 이권이나 개입한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이 말은 노건평 관련 사건을 계속 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내놓고 있다.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8/1204/IE000991524_STD.jpg

이런 연출은 이명박이 얼마나 노무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의 형이 구속되는 날, 가락동으로 달려가 이런 역겨운 사진을 찍으며 노건평과 연관이 된 농협을 비난하는 센스. 퇴임을 한 노무현에게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이명박은 쥐박이라고 놀림만 받으니 질투가 날만도 하겠지.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전, 도곡동 땅 문제나 BBK 문제 등으로 곤혹스런 상황에 여러 번 직면했으나, 그때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수구 언론 조중동과 추상 같은 검찰이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심지어 자기 입으로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나왔어도 검찰은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법치였고, 지금도 그 법치는 여전히 견고하게 유효하다.

유투브에는 아직도 이명박이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이명박과 검찰을 조롱하고 있다.

오해는 마시라. 노건평이 죄가 있으면 당연히 구속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이 지었던 죄업이, 아니 죄를 지었다는 “정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의 부도덕과 무능이 다가오는 진짜 경제 위기에서 더 빛을 발할 것라는 사실이다. 그때도 사진 한 장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또다시 길을 떠나며

또다시 길을 떠나며

일흔을 넘긴 늙은 시인은 또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칠십 평생 수많은 길을 떠나 왔지만, 그 길들은 언제나 세상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고, 그 누군가를 스치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길은 그가 떠나온 그 수많은 길과는 다른 길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자, 시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의 그 혈기왕성한 힘과 날카로움,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사그러들었지만, 시인은 조용한 안식을 얻었다. 삶은 그렇게 공평한 것이었다.

세상은 전혀 평화로와지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시인은 그 악다구니 속에서도 평화를 보았다. 아니 그는 자기가 떠나야 할 시간을 알고는 더 이상 그 팍팍한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는지도 모른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이제는 던져버리고 그는 그 원초적 기원으로 떠날 것이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있는 그 순수의 세계로.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낙타>

한 평생 살고 나서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제대로 살아냈음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시는 신경림만이 쓸 수 있는 시다.

아직도 나를 “아가”라 부르시는 어머니

아직도 나를 “아가”라 부르시는 어머니

며칠 전 어머니를 찾아 뵈었을 때, 어머니가 밥을 챙겨주시면서 하신 말씀.

“아가, 어여 와 밥 먹어라.”

“아가”라는 소리에 순간 콧등이 시큰해졌다. 사십이 다 되어가는 중년의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가”라고 하신다. 당신의 속으로 낳고 기른 자식이기에 어머니의 눈에는 흰머리가 늘어가는 중년의 자식이 아직도 코흘리개 초등학생처럼 그렇게 애틋하게 보이나 보다. 엄마가 될 수 없는 사내들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나 나도 자식을 낳고 길러보니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내가 세상 대부분의 여성들을 존경하게 된 것도, 그리고 모계 중심 사회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사실은 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사십 여년간 어머니가 내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어떤 사랑을 보여주셨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머니의 그런 정성과 사랑과 노동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자란 내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그리고 어머니가 될 이 땅의 여성들에게 어찌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셨었고, 세 아이들을 키우셨으며, 한 때는 조카들까지도 돌보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도시락을 7개씩 준비하셨다. 말이 쉽지 사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내게 야단 한 번 치지 않으셨으며, 언제나 따뜻했고, 밝았고, 긍정적이셨으며 그리고 정의로우셨다.

그러고 보니, 내 아버지를 비롯해서 우리 형제들은 지독히도 운이 좋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어머니 같이 훌륭한 사람을 “내” 어머니로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신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일이다. 젊었을 때는 꽤나 무뚝뚝했던 아버지도 지금은 대놓고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 말을 하신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신다.

어머니께 들려드리고 싶은 시가 있다.

어떤 세월로도 어쩔 수 없는 나이가 있다

늘 ‘내새끼’를 끼고 다니거나
그 새끼들이 물에 빠지거나 차에 치일까
걱정만 몰고 다니는

그 새끼들이 오십이 넘고 육십이 되어도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아
눈썹 끝엔 이슬만 어룽대는

맛있는 음식물 앞이거나 좋은 풍광도
입 밖의 차림새, 눈 밖의 풍경
앞가슴에 손수건을 채워야 안심이 되는

어머니란 나이

눈물로만 천천히 잦아 드는,
마을 입구 정자나무 한 그루,
그래도 끝내 청춘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강형철, 늙지 않은 절벽>

어머니가 늙지 않는 절벽처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그 어머니에게서 늘 “아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늘 건강하십시오.

아이들이 세상에 온 까닭

아이들이 세상에 온 까닭

별은
캄캄한 밤이라도
환한 낮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반짝인다네

꽃들이 피는 것은
웃음을 퍼뜨리기 위해서지

바람이 불어오는 까닭은
먼 곳에서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부지런히 일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들려주기 위해서라네

아이들이 세상에 온 까닭은 뭘까

꽃들은 말한다네
웃기 위해서라고
별들은 말하지
꿈꾸기 위해서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바람같은
아이 하나가 뛰놀고 있는 어른들은
말해 주어야 하네

‘얘들아,
너희들은 웃고 꿈꾸고 놀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단다’라고…

<편해문, 아이들이 세상에 온 까닭>

아이들은 웃고, 까불고, 꿈꾸고, 놀기 위해 왔는데,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왔는데, 정작 이 땅의 아이들은 웃음을 잃어가고, 꿈을 잃어 가고, 노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처질대로 처진 어깨와 창백하다 못해 회색빛이 도는 얼굴로 행복이 무엇인지 단 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경쟁의 정글로 내몰리고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다 죽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게거품을 무는 철면피들이 있는 한 우리 아이들의 웃음과 꿈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있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면목이 없는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