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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Poetry

달의 꽃

달의 꽃

일본의 하이쿠 시인 오니쓰라는 보름달 달빛 아래서는 모두가 꽃이라고 말한다.

나무도 풀도
세상 모든 것이 꽃
달의 꽃

木も草も世界みな花月の花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꽃처럼 아름답기를 기도한다. 한가위 달빛 아래에서 모든 것들이 꽃이 되길 기도한다. 그리하여 이곳이 천국이 되길, 밝은 달님 아래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천국이 되길 기도한다.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선생님을 뵌 지 올해로 꼭 삼십 년이 됩니다. 삼십 년 전, 저는 풋풋한 소년이었고, 선생님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셨지요. 세월이 살과 같이 흘러, 그때 청년이던 선생님이 벌써 정년퇴임을 하십니다.

새로 생긴 학교에 배정되었을 때, 제 부모님은 걱정을 좀 하셨습니다. 집에서도 멀었고, 학교에는 중장비가 지나다니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신 후,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했었습니다. 아마 선생님을 만나려고 그 학교에 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먼 길을 통학하던 것도, 선생님을 도와 반장으로서 학급을 운영했던 것도, 친구들과 같이 머리 맞대며 공부하던 일들도 모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선생님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우리 반은 모든 분야에서 상을 받아, 교실 한쪽 벽에 상장이 수도 없이 걸렸었습니다. 정말 신나고 재미있던 시절이었고, 아마 그때가 제 소년 시절의 절정이었을 겁니다.

선생님과 같이 갔던 심천 미루나무 숲도 생각나고, 김태곤의 망부석을 멋들어지게 부르시던 모습도, 언젠가 카메라를 새로 사셨다고 우리들 사진을 찍어주시던 것도 생각납니다. 아직도 그때 사진이 제 앨범에 남아 있습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남자답게 사나이답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늘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던 선생님. 선생님과 같이 했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제가 없었겠지요. 자주 연락도 못 드리고,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제 마음 속에 계십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이제 삼십 년이 넘게 교단에 계시다가 정년을 맞이하게 되셨네요. 정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감개무량하고 시원섭섭하시리라 짐작해 봅니다. 정년으로 교단을 떠나시지만, 선생님께서는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시겠지요. 저는 선생님의 원조 제자로 늘 선생님의 제 2의 인생을 응원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정년을 축하하며, 선생님의 진정한 여행을 위해 제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선물로 드립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선생님의 진정한 여행은 이제부터일 겁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엄마와 컴퓨터

엄마와 컴퓨터

타닥타닥 타닥타닥
늦은 밤
고요함을 깨고
낮게 울려퍼지는
컴퓨터 소리

엄마는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신다

낮에 보니
자판이 다 닳아 있는
엄마의 컴퓨터
마음이 쓰라린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반짝
나의 눈은 말똥말똥
엄마 손은 타닥타닥

밤 사이에 훌쩍 자라
내일 아침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시는 딸아이가 밤늦게 일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쓴 것이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아내의 고단한 노동과 그것을 보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딸아이의 예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첫눈

첫눈

설레임으로 다가왔다가
어설픔으로 끝나버린다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아련하게 남아
잊혀지지 않는 것



<소요유, 첫눈, 2013>

청춘

청춘

그거 알아요.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걸. 나이가 들면 몸은 늙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일흔이 넘은 노인들도 언제나 마음은 이십대라고 하잖아요. 그게 빈 말이 아니예요. 세월의 가르침을 잘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지고 깊어질 뿐, 늙지는 않아요. 청춘은 물리적인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예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거예요. 마음이 늙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청춘으로 남을 수 있어요. 모든 건 깨달음과 선택이고, 그리고 그 선택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린 거예요. 세상은 탐욕과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늘 청춘을 누려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회색신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유를 가져야 해요. 시간이라는 관념은 환상이고, 바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회색신사들에게 길들여진 걸 의미해요. 마음은 늙지 않고, 세상에 바쁜 일은 없어요. 욕심을 버리고 순간순간을 즐기기 바라요. 그러면 아무런 걱정이 없지요. 우리들은 언제나 청춘인 걸요.
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it is not a matter of rosy cheeks, red lips and supple knees; it is a matter of the will, a quality of the imagination, a vigor of the emotions; it is the freshness of the deep springs of life. Youth means a temperamental predominance of courage over timidity of the appetite, for adventure over the love of ease. This often exists in a man of sixty more than a body of twenty. Nobody grows old merely by a number of years. We grow old by deserting our ideals. Years may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enthusiasm wrinkles the soul. Worry, fear, self-distrust bows the heart and turns the spirit back to dust. Whether sixty or sixteen, there is in every human being’s heart the lure of wonder, the unfailing child-like appetite of what’s next, and the joy of the game of living. In the center of your heart and my heart there is a wireless station; so long as it receives messages of beauty, hope, cheer, courage and power from men and from the Infinite, so long are you young. When the aerials are down, and your spirit is covered with snows of cynicism and the ice of pessimism, then you are grown old, even at twenty, but as long as your aerials are up, to catch the waves of optimism, there is hope you may die young at eighty. <Samuel Ullman, Youth>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이다. 청춘은 인생이란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한 삶을 뿌리치는 모험심이다. 때로는 스무살 청년보다 예순살 노인이 더 젊을 수 있다. 나이 먹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된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이로움에 끌리는 마음, 어린이처럼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엔 마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체국이 있다. 다른 사람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의 교류가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에 덮여 슬픔과 탄식의 얼음 속에 갇힐 때 스무 살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고개를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 살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사무엘 울만, 청춘>
사려니 숲

사려니 숲

사려니 숲에
갔었지

사각거리는 붉은 송이 밟으며
안개가 스며드는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지

사방은 고요하고
숲은 침묵에 잠겨 있었지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무성한 숲 속
노루 한 마리
시간과 함께 침묵 속에 멈춰 있었지

그곳은
차마 사람의 발길이 닿지 말아야 했을
완전한 세상
속세로부터 이어지던 숲길이
점점 사라지고 말았지

사려니 숲에 다시
갈 수 없었지

<소요유, 2013년 7월>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질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간산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도종환, 사려니 숲길>

나무의 시

나무의 시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류시화, 나무의 시>

이 시는 류시화가 아들 미륵이에게 주는 시였는데, 아내는 이 시를 읽으며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내는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생애가 흔들릴 때, 내가 외로울 때,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내 옆에)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아내다. 항상 고맙고 사랑하는 나의 나무가 아내다. 나도 그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9월이 간다

9월이 간다

시인은 9월에 대해 이렇게 읖조렸다.

9월이 오면 강물이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 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9월은 슬픔과 분노와 아쉬움만을 남긴 채 가버렸다. 일년 중 가장 풍성한 때인 한가위가 있었음에도 9월은 도무지 신명도 즐거움도 없이 그렇게 가버렸다.

추석 전 날, 아이들을 위해 늘 노심초사 봉사하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사악한 검찰 집단에 의해 구속되었다. 추석이 지나자마자 7개 저축은행들이 영업 정지를 당했고, 그 저축은행에 돈을 예금한 서민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추악한 권력 비리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민노당과 참여당의 진보 통합 노력이 좌절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꿈꿔왔던 대중적 통합 진보 정당의 출현이 불발된 것이다.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가 안쓰러웠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희망이 속시원하게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런 바람과 희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바람들은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들은 늘 그런 바람과 희망이 실현되길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 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 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머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노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 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안도현, 구월이 오면>

9월이 가고, 10월이 온다.

들풀처럼 살라

들풀처럼 살라

시간은 존재하는가?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 불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시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관념 중 하나다. 지구 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간이란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고, 순간을 살뿐이다.

인간들이 던지는 궁극의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인간들 주위를 맴돌았다. 깨달은 몇몇은 실마리를 남긴 채 지구별을 떠났고, 남겨진 자들은 여전히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헤맸다. 남겨진 자들에게 삶은 버거운 짐이었다.

예수가 태어난 지 2011년째 되는 해. 2011은 지극히 인위적이고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이지만, 인간들은 또다시 지속되는 삶 속에 궁극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류시화, 들풀>

산과 들에 있는 풀과 나무와 바위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만 던질 뿐,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이 지구별을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生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리석음이 원죄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했던 말,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한나라당 출신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가 됨으로써 민주당은 자유선진당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위성 정당이 되었다. 민주당 대표 손학규가 노무현 대통령 묘소에 가서 무릎을 꿇었지만, 그 모습에서 아무런 진심이나 감동을 엿볼 수 없었다. 죽은 노무현은 말이 없었고, 손학규는 여전히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노무현은 한줌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재벌, 언론, 한나라당, 그리고 검찰 등으로 이루어진 이 땅의 특권 세력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파트 한채 부여 잡고 집값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은 성가시고 귀찮고 불편한 존재였다. 수구, 진보를 막론하고 노무현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고, 그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의 진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는 한줌 밖에 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도 너무 미안해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던 데다가 결벽증까지 있었던 터였다. 그는 쓸쓸히 스스로를 유폐시켜 갔다.

노무현이 죽자 세상은 그들이 원하던 지난 세월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욕하고 증오하던 그가 사라졌는데 정작 그들의 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강을 파헤치고 보를 세워 카지노배를 띄우겠다는 환상적 계획 앞에서도, 국민의 세금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음향대포를 들여와도, 배추 한포기에 만오천원이 넘어 김장을 하기 힘들어도, 경포대라고 노무현을 비아냥대던 손학규가 민주당의 대표가 되었어도 사람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미FTA에 대해 “좌파신자유주의”라고 게거품을 물던 진보들도 한-EU FTA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보도되면서 그가 쓴 <만인보>의 “노무현”이란 시가 회자되고 있다.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내는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고은, “노무현”, <만인보> 중에서>

고은 시인은 이미 13년 전에,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이전에 노무현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그가 정치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특권과 탐욕이 판을 치던 시대에 노무현은 이방인이었고, 그는 세상과 타협을 하거나 공존할 수 없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세상은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그를 후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이기 때문이리라.

노무현은 참으로 쓸쓸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쓸쓸함을 사무치게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