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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Life

꽃비

꽃비

바람이 부니 꽃비가 내린다.

하얀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아름다운 것들은 머물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그렇게 쉬이 떠나는 것.

과거도 미래도 없는 순간일 뿐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기억되지 않는 슬픔.

순간으로 존재하면 완전한 것이다.

 

4월 19일

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렸다.

닭공장 세상

닭공장 세상

옛날 닭들은 말이지, 양지 바른 뒷곁에서 유유자적하며 놀았어. 벌레 한 마리 잡아 먹고 하늘 한 번 쳐다 보고, 모래 한 알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 보고. 세상은 고요했고, 바삐 돌아가는 것은 없었어. 병아리들은 어미닭을 종종거리며 따라다니구. 가끔 시집 간 딸과 사위가 오면 제일 실한 놈이 잡혀서 털이 뽑히기도 했지만, 닭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있었지.

요즘 닭들은 말이지, 공장에서 태어나고 공장에서 자라다가 공장에서 죽어 가지. 세상이 변했어. 모든 것은 돈과 경쟁으로 환원되어 버려. 닭들은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닭장에 갇혀서 하루 종일 인간들이 갖다 주는 사료를 먹고 살을 찌우지. 달걀을 낳게 하려고 잠도 재우지 않고. 30촉 백열 전구 밑에서 숨을 쉬기도 힘들어. 병이라도 생기면 항생제가 기본이고,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이 돌면 그냥 산 채로 땅에 파묻어 버리지. 불과 30년 만에 세상은 그렇게 변했어.

그런데 닭들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인간들도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그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더군다나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은 하루 종일 닭공장 같은 학교와 학원에 가둬 놓고 숨도 못쉴 정도로 공부를 시켜. 사실 그런 것들을 공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 말이야. 아이들을 시험 잘보는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인간들은 그런 것을 경쟁력이라고 불러.

이런 닭장을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은 닭장 같은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거야. 거의 매일 같이 떨어져 죽거나 죽을려고 마음 먹는 아이들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는 세상이야. 중고등학교 아이들의 자살은 아예 관심도 없어. 교통사고 같이 취급이 되거든. 이제는 초등학생들도 죽고, 대학생들도 닭공장 같은 세상을 못견뎌 죽어 나가. 그런데도 인간들은 죽은 아이들의 연약함을 비난하거든.

세상은 닭들에게도 지옥이 되었고, 인간들에도 지옥이 되었어. 정말 돈만 잘 벌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닭공장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는 있는 건지, 언제까지 이런 닭공장 세상을 견디며 살 수 있는 건지, 아이들을 닭공장으로 밀어넣는 부모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정말 어쩔 수 없는 건지.

이런 것이 몹시 궁금한 봄날 아침인데, 목련과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었어. 아름다워서 슬프다는 것이 이런 건가?

부음(訃音)

부음(訃音)

인간들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된 이후 세상은 언제나 말세였고, 인간들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려 말세인 세상을 구원해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때때로 후세에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걸출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인간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을 저주하여 죽였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나타났다. 세계화된 자본주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꽃같은 젊은이들이 매일매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기에 그들은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젊은 시절, 기성세대들의 탐욕을 욕했던 젊은이들도 나이가 들자 그들의 부모를 닮기 시작했고, 그들의 아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말도 안되는 변명을 뇌까리면서 아이들을 무한 경쟁의 정글로 몰아넣었다.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 중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부터 죽어나갔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는 영화 제목으로만 의미가 있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나보다 나이 어린 이들의 부음(訃音)을 받을 때만큼 고역스런 일이 없다. 그들의 죽음에 공범 아닌 공범으로 그리고 기성세대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까. 그야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가 낳은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절망하여 세상을 뜨고, 부모들은 먼저 간 자식들을 생각하며 절망한다. 운 좋게도 아직 그런 상황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부모들은 여전히 자식을 위한다며 그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절망의 악순환은 중단되지 않는다.

섬진강의 매화와 진해의 벚꽃이 만개하여 이 조그마한 땅 한반도에 온통 꽃향기 휘날릴 때에, 어떤 아이들은 어디선가 혼자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봄에 슬픈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별 일 없는 삶

별 일 없는 삶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자 지붕 위 고양이 두 마리가 아무 생각없이 낮잠을 잔다. 그 고양이들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잔다. 세상에서 잘난 고양이가 되겠다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의 삶이 저 봄볕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만도 못한 세월이다. 2011월 3월 11일, 일본 북동부 센다이 앞바다에서 규모 9.0의 지진이 일어났다. 엄청난 지진 해일이 일본 동쪽 해안을 덮쳤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온 마을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고, 그 순간이 TV로 생생히 중계되었다. 지진에 익숙한 일본 사람들도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다. 지진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도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여섯 개의 원자로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만에 하나 이 원자로들이 폭발한다면, 일본은 물론, 북반구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체르노빌 때와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그런 참혹한 상황이 될 것이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폐가 걸려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이제 일본 사람들은 지진과 해일의 피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건설해 놓은 원자로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그들은 원자력이 얼마나 가공할 파괴력이 있는 것인지 이미 60여년 전에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리비아에서는 국민들을 상대로 폭격을 하는 독재자가 군림하고 있고, 그 독재자를 제거하기 위해 외세가 개입하였다. 물론, 그 외세들의 목적은 리비아 국민들을 구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원유라는 이권 확보에 있다. 최근 들어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봄볕 아래 아무 생각 없이 낮잠을 자는 고양이들처럼 욕망을 줄이면 줄일수록 별 일 없이 살 수 있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벌어지는 것들이다. 인간들의 탐욕이 자연이 허용하는 본능을 넘어섰기 때문에 발생하는 재앙들이다. 일본과 리비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도 아무 별 일 없는 일상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500회 특집 인터뷰> 소요유를 만나다

<500회 특집 인터뷰> 소요유를 만나다

소요유 블로그가 블로그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6년 9월 26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5개월 전의 일입니다. 길다면 긴 시간인데, 그 기간동안 소요유 블로그에는 제법 많은 글들이 올라왔고, 이제 500번째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500이라는 숫자가 아무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500회 특집 인터뷰 “소요유를 만나다”를 준비했습니다. 이건 그냥 재미로 하는 겁니다.^^

사회자: 요즘은 SNS의 돌풍으로 블로그가 한풀 꺾인 모양새입니다. 예전과 같은 블로그계의 활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젊은 세대들은 긴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소요유: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이 블로그는 인터넷 상에서 소요유의 정체성을 가감없이 보여 줍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저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노닐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에 글을 쓰면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가끔은 이름모를 벗들도 들러서 한 마디씩 거들어 줍니다. 저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계정을 갖고 있지만, 많이 사용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남의 집에 와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내 집입니다. 아무리 초가삼간이라지만, 내 집이 제일 편한 법이지요. 아마 별 일 없으면 이 공간은 제가 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남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자: 예전에는 글을 꽤 많이 썼는데, 최근에는 글을 자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요유: 바쁘다는 것은 물론 핑계구요, 예전과 같은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글을 쓸만한 얘깃거리도 마땅치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오랜 기간 침묵했었고, 이명박 패거리들의 얘기는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얘기고,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언제였던가 뜨거운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구경꾼이 된 거고, 비겁해진 겁니다. 하기야 저는 늘 주변인이었기 때문에, 다시 구경꾼이 되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네요. 원래 구경꾼이었던 것 같군요.

사회자: 소요유 블로그의 중요한 얘깃거리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노무현에 대해 왜 그리 지독하게 천착하는지요?

소요유: 이 땅 한반도에 역사가 생기고, 노무현 같은 정치인은 처음이었습니다. 바로 그 역사의 순간에 제가 숨을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농민의 아들이 정의와 상식, 그리고 원칙을 부여잡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이 한반도에서 처음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나라에 어찌 그런 사람이 나왔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불가해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신화가 되어버린 거지요. 그 이름은 주홍글씨로 제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회자: 노무현이 무슨 예수라도 되는 듯이 얘기하는군요. 그렇다면 신은 존재합니까?

소요유: 대부분 종교에서 흔히 얘기하는 그런 천지를 창조한 아버지 같은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킨스의 주장은 옳습니다. 그러나 신은 존재합니다. 이 세계 만물의 모든 개별성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이 신입니다. 신은 세상의 창조자도 아니며,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신은 의지도 없고 욕망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따름입니다. 신은 언제나 일인칭입니다.

사회자: 소요유의 정치적 좌표를 짐작해 보면 무정부주의에 가까워 보이는데요.

소요유: 노암 촘스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띄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누구의 지배를 받거나 누구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가 말씀하셨던 황금률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사회자: 예수를 자주 언급하는데, 혹시 기독교 신자인가요?

소요유: 어렸을 적에는 교회에 나가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고 난 후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의 가르침을 저버린 건 아닙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오히려 교회에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 뿐입니다. 교회와 관련되어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인데, 제가 다니던 조그마한 개척 교회 목사님이 어느 일요일 아침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몹시 가난했고, 나이가 많았으며, 건강도 좋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저를 밥상머리에 앉혀 놓고 다짜고짜 나중에 커서 목사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아무 영문을 모른 채 그냥 그러겠다고 얼버무리고 나왔습니다. 그 이후 얼마되지 않아 그 가난하고 늙고 병든 목사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분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 일요일 아침의 밥상머리 대화는 일종의 유언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대화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회자: 소요유의 글을 읽어 보면, 불교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오는데 윤회를 믿나요?

소요유: 불교와 윤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책을 읽고 난 후입니다. 지난 번에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노숙자 한 분이 다가와서 윤회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자기가 가르침을 줄테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제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지금 아니면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느라 그 노숙자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영원히 잃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회자: 의학에도 제법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요.

소요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오래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의학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고, 현대 의학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의학이든, 신학이든, 법학이든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우리가 얼핏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관념들은 그것들의 실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번민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모를 때가 마음은 더 편한 것 같습니다.

사회자: 최근에는 행복에 대한 글들이 종종 보이던데,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소요유: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선택입니다. 특별해지길 포기한다면 그리고 그 포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랫만에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너무 아프네요. 기침도 나구요. 쿨럭 쿨럭.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 주세요. 시간이 나면 대답해 드릴테니. 나이가 드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구만요. 쿨럭 쿨럭.

사회자: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하지요. 아무튼 500번째 글 축하드리구요. 게으름 피우지 말고 꾸준히 블로깅하기 바랍니다.

소요유: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게으른 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타고난 걸 어쩌란 말입니까?^^ 아무튼 모두들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쿨럭 쿨럭.

삶에는 직선이 없다

삶에는 직선이 없다

지난 추석 물난리 때도 얘기했지만,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자연은 직선을 만들지 않는다. 직선은 인간들처럼, 욕망이 본능을 넘어서는 탐욕적인 생명체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선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을 추구하는 인간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의 삶도 직선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에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실패가 없었기에 너무 어린 나이에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 그런 사람들에게는 삶의 향기, 인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다.

많이 실패해 보고, 많이 넘어져 보고, 많이 아파 보고, 시련을 겪어 보고, 그 시련을 이겨도 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삶은 깊어지고, 향기가 난다. 그러므로, 세상에 공짜는 없고, 삶은 공평하다. 누구나 어려움과 고난은 싫어하지만, 정작 그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면 그는 더 깊고 유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전직 교사이자 현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표인 송인수 씨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삶에 울림을 준다.

저는 인생에 직선은 없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부모님은 아이가 샛길로 새지 않고 직선으로 달려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생에는 직선이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4대강을 다 펴면 아름답겠습니까. 곡선이니까 유장한 거지요. 유장하려면 깊이 있는 물이 돼야 합니다. 깊이 있는 생각, 통찰을 품어야 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방해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로를 선택하고 다음 진로를 찾을 때 지금 있는 길과 전혀 다른 쪽으로 점핑을 하는 게 아니고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다음 일의 실마리가 찾아집니다.

[시사IN, “우리 인생에 직선은 없다”]

깊이있는 물이어야 바다에 닿을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라. 때로는 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상처가 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뒤돌아볼 줄 아는 삶, 때로는 더디더라도 더불어갈 줄 아는 삶, 그리하여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삶을 누리라.

설을 맞아 이제 11살이 되는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지 딸아이가 알아 들을까? ^^

들풀처럼 살라

들풀처럼 살라

시간은 존재하는가?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 불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시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관념 중 하나다. 지구 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간이란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고, 순간을 살뿐이다.

인간들이 던지는 궁극의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인간들 주위를 맴돌았다. 깨달은 몇몇은 실마리를 남긴 채 지구별을 떠났고, 남겨진 자들은 여전히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헤맸다. 남겨진 자들에게 삶은 버거운 짐이었다.

예수가 태어난 지 2011년째 되는 해. 2011은 지극히 인위적이고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이지만, 인간들은 또다시 지속되는 삶 속에 궁극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류시화, 들풀>

산과 들에 있는 풀과 나무와 바위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만 던질 뿐,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이 지구별을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生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리석음이 원죄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특별해지기를 포기하라

특별해지기를 포기하라

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리 짧지도 않았던 나의 생을 돌아보면 대체로 평온했다. 운이 몹시 좋은 편이었다. 그것 밖에는 달리 평온한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육체적으로 아주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것을 고통이라 생각하기보다는 그런 시련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시련도 사라져야 할 때가 되니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의도한 것은 없었다. 대체로 평온한 삶 속에서 나는 순간순간 행복했는데, 그 행복한 이유는 아무것도 집착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포기가 무척 빠른 사람이었다.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속담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번은 찍어 보지만 넘어가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열에 아홉은 한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였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는 한번 찍어 넘어가는 나무가 있었고, 나는 그 나무를 선택해 버렸다. 내 삶의 궤적은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졌다. 학교도, 직장도, 결혼도 모두 그런 식이었다. 사람들이 왜 성공을 하려 하는지, 왜 부와 명예를 쫓는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성공, 부, 명예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면 대체로 편안해진다. 무엇을 갖고자 하는 욕망,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것이 “책”인데, 그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에게 의미가 없어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전히 책을 사고 책을 읽는다.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학자, 릭 핸슨(Rick Hanson)과 리처드 멘디우스(Richard Mendius)가 쓴 책 <붓다 브레인(Budda’s Brain)>은 추천할만한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자아 내려놓기”는 누구나 한번은 읽어보았으면 하는 부분인데, 특히 내 삶의 궤적을 합리화할 수 있는과학적 논리를 제공해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몹시 기쁘고 행복했다. 저자들이 신경과 뇌를 연구하면서 밝힌 사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는 “나” 또는 “자아”는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신경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매일 느끼는 통합적인 자아란, 완전한 환상에 불과하다. 뚜렷하게 일관성 있고 확고한 ‘나’라는 개념은 사실은 발달 과정을 거쳐 여러 하부 및 하부-하부 체계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중추도 없으며 ‘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희미하고 산만한 주관성의 경험을 통해 날조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란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한데, 결국 종교(특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깨달음의 첫걸음은 이런 자아의 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자아가 원래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아를 벗어나기가 한결 쉬울 것 같다.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인데, 그 개념은 욕망과 함께 자라난다.
자아는 소유에서 자라난다. 자아는 주먹 쥔 손과 같다. 손을 펴서 내어 주면, 주먹은 사라지고, 자아도 사라진다.
이 대목은 왜 법정 스님께서 늘 무소유를 주장하셨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자아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 바로 무소유였기 때문이다. 욕망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견고했던 자아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자아가 사라질수록 우리는 평안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몇 가지 충고들은 나를 몹시 기쁘게 했는데, 그것은 때때로 아내가 나에게 “무대책적 낙관주의자”라며 핀잔을 줄 때 써먹을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특별해지기를 포기하라. 중요한 사람이 되고 존경받고 싶다는 갈망을 버려라. 포기는 집착의 반대이므로 행복으로 가는 특별한 급행로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이 될 이유도 없었고, 되고 싶지도 않았던 내 삶이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학교에서의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늦은 일인데도 아직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쓰레기 언론에서도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자 아무 대책도 없이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했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그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정말 사람을 때려서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게 진심인지, 아니 객관적으로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아이들이 맞기 싫어서 말을 듣는 것이 정말 교육이라고 생각하는지, 교사라고 해서 정말 아이들을 때릴 권리가 있는지, 그것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이란 교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매”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널 너무나 사랑하기에 널 죽도록 팬다? 너무나 웃긴 얘기다.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하지 않듯이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체벌 금지가 학교 현장을 몰라서 하는 순진한 얘기라고 몰아부친다. 체벌을 금지하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체벌 금지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람들은 교육 현장에서 떠나야 한다. 체벌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없다는 사람들은 이미 교육자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아버지이며, 어른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이상 증상을 보일 때는 분명 기성세대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거의 대부분 어른들의 책임이다. 부모의 책임이고, 교사의 책임이고,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때려서라도 가르치겠다? “나는 똑바로 걸을 수 없지만, 너는 똑바로 걸어야 돼”라고 울부짖는 엄마 게가 생각난다.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겠다고 하는 발상은 일본제국주의와 군부독재와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하긴 아직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일제잔재와 독재부역 세력들이니 학교에서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렇게나마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잔인한 본능, 그리고 희망

잔인한 본능, 그리고 희망

지구 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동물인 인간은 생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종족을 공격하거나 죽인다. 같은 종족끼리 전쟁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동물은 인간이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는데,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흡사하다는 침팬지에게서도 이런 경향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제인 구달이 쓴 <희망의 이유>에는 한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를 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나온다.

침팬지 길카가 새끼를 안아 어르고 앉아 있었을 때, 또 다른 침팬지 패션이 나타나서 잠시 동안 노려보다가 털을 세우고 공격했다. 길카는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나 그녀는 절름발이였다. 1966년 유행성 소아마비로 손목 관절 하나가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던 것이다. 절룩거리는데다가 보호할 새끼까지 데리고 있어서 길카에게는 가망이 없었다. 패션은 그 새끼를 잡아채어서 앞이마를 한번 강하게 물어죽이고 나서, 딸과 어린 아들과 함께 소름끼치는 축제를 벌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중에서>

침팬지 패션은 먹을 것이 없어서 길카와 그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은 것이 아니다. 이런 소름끼치는 행위가 인간만큼 빈번한 것은 아니지만, 침팬지들도 증오와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몇 백만년 전에 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형질이 유사함을 말해준다.

며칠 전, 어느 장애여성이 무자비한 구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조사결과 이들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에 붕대까지 감았으며, 50대씩 돌아가며 때리기도 하는 등 무자비하게 김씨를 집단구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이들은 김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고 경찰은 밝혔다.

<성폭행범으로 오해받자 장애여성 집단구타로 숨지게 해, 노컷뉴스>

이런 잔인한 사건들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맹자는 인간들이 본래 선하게 타고 났다고 말하면서 측은지심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측은지심과 더불어 극도의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배금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서는 이러한 잔인한 풍경이 일상이 되고 있다.

제인 구달은 올해로 76살이 된 할머니이다. 1년에 300일 이상 지구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희망을 말한다. 그는 몇 되지 않은 희망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아직 인간들이 지구를 더 이상 망치지 않고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여전히 낙관적이고, 유쾌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의 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