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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이 정도

이 정도

빠르게 가야 한다고
세상은 재촉하지만
난 가만히 멈춰 서서 하늘을 봐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
서두르는 법이 없지
난 구름처럼 갈 거야
이 정도로 이 정도로
이 정도도 괜찮아
이만큼만 이만큼만
이만큼도 충분해

내가 가야 하는 길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아냐
빠르고 느린 것 이기고 지는 것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
서두르는 법이 없지
난 구름처럼 갈 거야
이 정도로 이 정도로
이 정도도 괜찮아
이만큼만 이만큼만
이만큼도 충분해

세상이 나에게 왜 그리 느리냐고 하면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그랬다 하겠어
그대가 나에게 왜 그리 더디냐고 하면
나무 아래 쉬었다 가느라 그랬다 하겠어
세상이 나에게 더 빨리 오라고 하면
나는 구름 따라 흘러가겠다고 하겠어
그대가 나에게 더 빨리 오라고 하면
웃음이나 한 번 더 나누자 할래

이 정도로 이 정도로
이 정도도 괜찮아
이만큼만 이만큼만
이만큼도 충분해

<양양, 이 정도, 2008>

아내와 나 사이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월간 《우리詩》, 2008>
무심재(無心齋)

무심재(無心齋)

무심재는 건축주가 일찍이 지은 이름이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심은 무분별심을 뜻하는 것으로 ‘분별이 없는 마음, 망상이 없는 깨어있는 마음’을 말한다. 즉, 이해득실로 귀결되는 분별에서 벗어나 거대한 우주의 흐름에 올라타는 맑고 밝은 마음의 상태이다. 하지만 무심한 주거공간을 상상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다. 긴 논의 과정 끝에, 무심재는 주인이 귀가하여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풀려나 오로지 충만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됐다.

조그만 인간 존재 의미를 거대한 자연과 병치시켜 유장한 흐름 속에 삶도 죽음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그런 집. 그것을 이루기 위해 먼저 대지가 위치한 계룡산의 뛰어난 자연경관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 집의 모든 거주하는 방들은 산을 면하는 쪽에 배치하였다. 거실과 서재에는 바닥부터 시작되는 큰 창으로 넉넉하게 계룡산 능선을 끌여들였다. 특히 2층에 위치한 거실은 창을 향해 점점 열리는 각도의 벽을 이용해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코니 난간도 최대한 투명하게 디자인 하였다. 안방과 손님방의 창은 가장 오래 머무르는 가구(침대)의 높이를 기준으로 하늘과 산과 숲이 다가오게 하였고, 다락의 천창은 밤하늘의 별을, 계단실 창은 걸어 올라오면서 계룡산 최고봉인 삼불봉을 마주한다.

무심재는 아주 간결하고 소박한 연면적 60평도 안되는 작은 집이다. 조형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대지 고저차에의 대응, 그리고 박공지붕으로 인해 보통의 주택과는 다른 내부 공간 높이를 지닌다. 재료와 색채, 디테일은 검박하게 결정되었지만 공간의 프로파일은 은근 당당하며, 풍부하고 기품 있는 볼륨과 다양한 시점을 제공한다. 모든 것을 더도 덜도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갖추려 했다. 그렇다 해도 무심하고자 하는 건축주의 분별 있는 마음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길 바란다.

<조항만, 건축문화, Vol. 502, March 2023, pp. 38-45.>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은 이엉이 덮이고
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迷惑)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

<법정 역, 숫타니파타, 18-19, 이레, 1999>

순례자 나무

순례자 나무

나무는 천 년을 두고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길 떠난다

울타리 마구 넘는 탱자꽃
마을 돌담길 따라 멀리
길 떠난다

까투리 병아리
물자국 따라 하늘 낮게 지나고
날치며 끼어드는 천둥번개

잘가라 끄덕이는 코스모스
붉거나 희게 그리워지는
풍경 속으로

돔바르게 손 흐드는 단풍
눈보라 두동지게
되돌아온다

나무는 천 년을 두고
가도 가도 떠난 그 자리,
길 되돌아온다

<박종빈, 순례자 나무, 2021>
영원한 순수의식

영원한 순수의식

20세에는 내 몸이 튼튼하고 활력 있음을 안다. 60세에는 내 몸이 약해지고 늙었음을 안다. 나의 생각 역시 20대 때와는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몸이 젊거나 늙었다고 아는 마음, 내 생각이 변했다고 아는 맑은 마음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 맑은 마음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이다. 순수의식이다. 형상을 벗어난 ‘한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잃을 수 있는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김영사, 2004, p. 116>

어른 김장하와 무주상보시

어른 김장하와 무주상보시

무주상보시는 남을 도울 때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돕는 행위를 말하는데, 그런 보시는 정말 드물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 대개 사람들은 남을 도울 때조차 그 도움이 내게 어떤 이로움을 가져올지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보시가 아니라 거래일 확률이 높다.

평생을 무주상보시를 행하며 살아온 김장하 선생은 살아있는 보살이다. 거짓과 위선과 탐욕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한 이유는 선생과 같은 의인이 있기 때문이다.

죄인과 영웅

죄인과 영웅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빌렘이 말했다.

“너의 말은 다만 말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너의 말은 뉘우치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너는 너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라.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라.”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사업에 실패해서 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

“그것은 세속의 마음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너의 마음의 깊은 곳에 또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말하기 힘들어도 그것을 말해라.”

안중근은 눈을 감고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안중근이 말했다.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쓰러뜨리고 나서, 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 p. 272-278>

고통의 시작

고통의 시작

주어진 상황을 마음속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나쁜 것’으로 명명하고 분류할 때 고통은 시작된다. 당신은 주어진 상황을 원망하고, 원망은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립하는 ‘나’를 이끌어낸다.

명명과 분류는 습관화된 것이지만 타파할 수도 있다. 먼저 작은 것부터 ‘명명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예를 들어 비행기를 놓치거나 컵을 깼거나 진창에 넘어졌을 때, 그것을 ‘나쁜 것’ ‘고통스러운 것’으로 명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의 ‘그러함’을 즉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나쁜 것으로 명명할 때 내면에 정신적 위축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순간 놀라운 힘이 내면에 생긴다.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김영사, 2004, p. 128>

괴로움의 시작은 분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