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앎’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부처며 하나님이며, 진리며 도를 대상처럼 대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처럼 구해서 우리 안에 소유하려 하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됨’의 일입니다. 그렇기에 무아는 아는 깨달음이 아니라, 되는 깨달음입니다. 대승불교에서의 공(空)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선 나 자신이 철저한 공이 되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실체를 고집하지 않고, 허공처럼 활연히 열릴 적에야 비로소 진리와 자연스레 만나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렇듯 앎의 문제가 아닌, 됨이자 체화의 일입니다. 그래서 진리와의 진정한 체화를 두고 계합(契合)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계합을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비움과도 같습니다.
Slip inside the eye of your mind Don’t you know you might find A better place to play? You said that you’d never been But all the things that you’ve seen Will slowly fade away
So I start a revolution from my bed ‘Cause you said the brains I had went to my head Step outside, summertime’s in bloom Stand up beside the fireplace Take that look from off your face You ain’t ever gonna burn my heart out
And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 on by Her soul slides away “But don’t look back in anger,” I heard you say
Take me to the place where you go Where nobody knows If it’s night or day Please don’t put your life in the hands Of a rock ‘n’ roll band Who’ll throw it all away
I’m gonna start a revolution from my bed ‘Cause you said the brains I had went to my head Step outside, ’cause summertime’s in bloom Stand up beside the fireplace Take that look from off your face ‘Cause you ain’t ever gonna burn my heart out
And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 as she’s walking on by My soul slides away “But don’t look back in anger,” I heard you say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 Her soul slides away “But don’t look back in anger,” I heard you say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 as she’s walking on by My soul slides away “But don’t look back in anger Don’t look back in anger,” I heard you say
어떤 순간이 주어지든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허약하고 한계에 갇힌 존재라는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일련의 생각과 감정과 기분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참본성은 순수하고 조건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상처 입을 수 없음을 기억할 수도 있다. 무지의 잠 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이 늘 깨어 있음을 기억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당신 존재의 무한한 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 허약함, 두려움, 분노, 욕망은 참본성이 지닌 무한한 잠재 능력의 표현들이다. 그러한 선택들에는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불교 수행의 열매는 단순히 이것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의 참본성은 그 범위가 무한히 넓기 때문에 이런저런 마음의 괴로움들은 모두 그중 하나의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무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자각을 선택하는 것이다. 삼사라와 니르바나는 단순히 우리가 어떤 관점을 선택해 자신의 경험을 바라보고 이해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니르바나에 마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삼사라에 나쁘고 잘못된 것은 없다. 만일 과거의 경험에 의해 자신을 한계가 있고 두려움으로 차 있고 허약하고 겁 많은 존재로 생각하기로 결정 내렸다면, 그것은 다만 당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다르게 경험할 기회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도.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 티베트의 즐거운 지혜, 문학의숲, 2009, pp. 323-324>